※ 편집자 주 : ‘일본 미제사건 갤러리’는 일본의 유명 미제 사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2014년 1월 18일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北九州)의 한 바닷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 날 일본 해상보안청(해경)으로 신고 한 통이 접수됐다.
방파제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보트가 표류 중이라고 했다. 현장에 출동한 해경은 폭 3m에, 작은 엔진이 달린 고무보트 한 척을 발견했다. 보트는 주인 없이 떠도는 유령선이 아니었다. 검은색 점퍼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구조가 시급했다. 하지만 불청객 같은 폭풍우가 문제였다. 일본 해경의 구조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가 탄 보트를 거꾸로 뒤집기까지 했다. 마치 그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막으려 애쓰는 것만 같았다.
2014년 1월 20일. 이틀이 지나서야 바다는 평온을 되찾았다. 해경은 보트가 뒤집힌 해역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다. 수심 7m 아래에서 남자 시신 한 구를 건져 올렸다. 해경이 찾던 ‘그 사람’이 맞았다. 남자의 정체는 일본 내각부(内閣府) 산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30살 A씨. 내각부는 일본 내각 정부의 행정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우리나라로 따지면 행정안전부와 비슷한 곳이다. A씨는 2010년부터 내각부 산하 경제사회총합연구소에서 근무하다 2013년 2년 일정으로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는 일본 명문 도쿄(東京)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2004년 도쿄대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했고, 2006년 경제학 전공으로 같은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미네소타대에서는 거시경제학 박사 과정을 준비 중이었다.
전도유망한 엘리트 공무원이 어느 날 갑자기 시신으로 발견되자 일본 경시청(경찰)은 수사에 나섰다. 2014년 2월 6일 A씨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부산의 한 호텔이란 사실을 확인한 경시청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ㆍInterpol)를 통해 한국 경찰에 A씨의 행적 파악을 요청했다. 그러자 죽음 만큼이나 황당한 행적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권 있는데 분실신고, 영어로 말하며 ‘홍콩인’ 행세까지
한국 경찰에 따르면 A씨가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한 날짜는 2014년 1월 3일. 입국 기록과 이날 투숙한 서울 북창동 B호텔의 방문 기록을 통해 ‘크로스 체크’ 되는 내용이다. 이상한 건 이후부터 였다. A씨는 한국에 온 지 이틀 째인 4일 B호텔에 자신의 여권과 가방을 맡기고, 서울역 인근 C게스트하우스에 방을 잡았다. 이어 오후 2시쯤 B호텔에서 여권과 가방을 돌려 받았다.
5일 서울역 인근의 한 대형마트. A씨가 작업용 장갑을 사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후 행적이 묘연했던 그는 6일 오후 4시쯤 서울 남대문경찰서 서소문파출소에 다시 얼굴을 비춘다. B호텔 직원과 이 곳을 찾아 “여권 케이스를 잃어버렸다”며 분실신고를 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이 추후 밝힌 내용에 따르면, 당시 분실 신고를 한 여권은 A씨의 가방에 잘 보관돼 있었다.
분실 신고를 한 A씨는 서울 성수동의 한 보트 매장을 찾아갔다. 영어를 쓰고, 홍콩인 행세를 하며 ‘알렉스 포(Alex Po)’라는 가명으로 폭 3m짜리 고무 보트와 모터를 약 100만 원에 구입한 뒤 택배를 부쳤다. 행선지는 부산의 D호텔이었다. 매장을 나온 A씨는 한국인 친구를 만나 다음 날인 7일까지 같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8일, A씨는 C게스트하우스를 나와 남대문의 E호텔로 향했다. E호텔에 투숙한 A씨는 같은 날 오후 6시쯤 자동차용 배터리와 조명 배터리를 1개씩 구입한 뒤 택시를 잡아 부산 D호텔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여기까지가 영수증 기록, 폐쇄회로(CC) TV 영상 등을 통해 확인된 A씨의 행적이다.
A씨는 그저 조금 더 유난스럽고, 잠자리가 까다로운 여행객이었던 걸까? 숙박업소를 3번이나 바꾸고, 보트와 모터를 가명으로 구입한 뒤, 그것도 모자라 홍콩인 행세를 했으니 말이다. 미네소타대에 따르면, A씨가 한국에 온 목적은 2014년 1월 8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열린 ‘아시아-퍼시픽 소셜사이언스 컨퍼런스(APSSC)’ 참석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그는 호텔은커녕 행사장 근처에도 모습을 비추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일본 스파이?…경찰 “스파이치고는 너무 어설퍼”
부산에서 사라진 지 열흘이 지난 2014년 1월 18일. A씨는 기타큐슈 해상을 떠다니던 소형 보트에서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국내 행적을 토대로 증발한 열흘의 동선을 짜깁기 하듯 맞춰 보면 이렇다. 이 기간 A씨는 자신이 구입한 보트를 끌고 한반도 남부의 어느 해안가로 갔을 것이다. 이어 장장 200㎞에 달하는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바다 위에 보트를 띄웠을 것이다. 물론 해협 전부를 보트로 건넌 건지는 알 수 없다. 쓰시마섬(대마도)까지는 어선을 타고, 이후 보트로 갔다는 일본 현지 보도도 있다. 중요한 건 A씨가 어떻게든 자신의 일본 행을 숨기려 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무성한 추측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가설은 ‘스파이’ 설이다. 일본 정부의 스파이인 A씨가 한국에서 공작을 벌이다 일이 틀어지자 도피하는 과정에서 조난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도 적잖다. 특히 ‘스파이치고는 행동이 너무 어설펐다’는 게 문제다. 일본 경시청 요청으로 수사를 진행한 서울지방경찰청 외사과 관계자는 “A씨가 여권 케이스를 잃어버렸다고 분실 신고를 하거나, 고무보트를 구입한 과정이 어설픈 점 등 스파이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스파이 등 혐의가 보이면 단서를 잡아 수사를 했겠지만, (진짜) 스파이라면 이런 식으로 안 한다”며 “밀항이 범죄인 부분도 생각했지만, 이미 A씨가 사망해 공소권이 없다. 또 실익도 없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스파이 설’이 세간의 입길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A씨 시신 발견 당시 일본 당국의 대처 때문이다. 일본 경찰은 A씨를 발견한 지 16일이 지난 2014년 2월 6일이 돼서야 뒤늦게 수사 공조를 요청했다. 아울러 한국 경찰이 서소문파출소를 통해 신원을 확인하기까지, A씨가 내각부 소속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A씨가 소속돼 있다는 연구소도 의심스러웠다. ‘△△연구소’, ‘△△협회’라는 위장기관을 만들어 대내외 정보 수집에 활용하는 건 일본의 총리 직속 정보기관 내각정보조사실이 주로 쓰는 방법이다. 또 A씨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경제와 거리가 먼 컨퍼런스에 참석하려 했는데, 일본 정부가 출국 허가를 내준 것도 이례적이다. 보트는 또 어떻게 옮겼을까? A씨가 타고 있던 보트의 무게는 230㎏. 건장한 성인 남성이 혼자 들기 버거운 무게다.
무엇보다 밀항의 이유를 쉽게 짐작하기 힘들다. A씨는 대체 무슨 이유로 1월 한겨울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해야 했을까. 일본 경시청은 이에 대해 “개인 가정사라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는 24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사건 자체는 알지만, 자세한 설명이 힘들다”고 말했다. 서울경찰청, 부산경찰청 외사과에서도 특별한 답을 주지 않았다. 진실은 여전히 대한해협 어딘가를 표류하고 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