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엘리트 직장인 사이서 열풍
수입 70% 이상 저축해 노후 대비
블로그ㆍ팟캐스트서 노하우도 공유
30대 말이나 늦어도 40대 초에는 은퇴하겠다는 ‘파이어(FIREㆍ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족이 미국의 젊은 엘리트 직장인들 사이에서 급속히 생겨나고 있다. 이른 시간 내에 은퇴 자금을 모으려는 이들 사이에선 근검 절약의 노하우를 제공하는 블로그나 팟캐스트 방송도 인기를 얻고 있다. 소비 지상주의 세태에서 성장한 이들이 조기 은퇴를 위해 반(反) 소비 문화에 쏠리고 있는 것이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소개한 파이어 족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온갖 극단적 방법을 동원한다. 시애틀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38세의 실비아 홀은 40세에 은퇴하는 것이 목표다. 그 때까지 200만달러를 모으기 위해 그는 유통기한 직전의 떨이 식품을 할인가로 구입하는 등 식료품 비용으로는 월 75달러만 쓴다. 또 직장은 걸어 다니며,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는 친구 아이디로 접속해 즐기고, 여행은 카드 포인트를 활용한다. 이런 자린고비 같은 생활로 수입의 70% 이상을 저축하는 것이다. 은퇴 후에는 숙박공유 사이트인 에어 비엔비를 통해 세계 각국을 여행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그와 같은 파이어족들에게 짠돌이 정보를 제공하는 한 인기 블로그는 최근 30일간 250만의 페이지뷰를 기록했고, 2017년 초에 개설된 한 인기 팟캐스트는 다운로드 횟수가 520만에 달했다고 WSJ는 전했다. 실제 30대에 은퇴해 자족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올리며 소비 절약과 조기 은퇴 전도사 역할을 하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안에 몇억 모으기 식의 재테크 열풍이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유행한 것이지만, 파이어족의 돈 모으기는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기 은퇴가 목표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파이어족의 근검 절약은 검소한 삶을 추구했던 과거의 사회 운동과도 다르다. 1990년대에 ‘돈이냐 삶이냐’라는 베스트셀러로 소비 절약 바람을 일으켰던 비키 로빈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에 우리의 목표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구하기 위해 소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주로 종교인이나 환경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다”며 “지금의 파이어 추종자들은 세금이나 회계 등의 계산에 매우 밝다”고 말했다. 요컨대 파이어족은 큰 부자가 될 생각이 없다는 점에선 재테크 족과 다르지만, 철저한 재테크로 은퇴 자금을 모으고 이 돈을 다시 굴려서 은퇴 생활을 한다는 점에선 환경주의자들의 방식과도 다른 것이다.
파이어족을 규정짓는 핵심 특징은 결국 ‘조기 은퇴’다. NYT가 소개한 파이어족의 사례는 이 젊은 직장인들이 왜 조기 은퇴에 매달리는지 보여 준다. 의료 장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칼 젠센은 연간 11만달러의 수입을 올렸지만,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업무 특성상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업무 스트레스에 지치다 지난해 43세로 은퇴했다. 약사로 근무했던 제인스 롱의 경우 약값은 치솟고 환자들은 늘 보험회사와 싸우고, 과잉 처방으로 약물 중독 문제까지 불거지는 그의 직업에 염증을 느낀 경우다. 직장 생활에서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단지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데 대한 환멸이 크다는 얘기다. WSJ은 그러나 파이어족이 재정적인 독립을 추구한다지만, 은퇴자금으로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금융시장이 악화하면 은퇴 이후 생활이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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