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경제정책방향]
지역 경제 파급 효과 큰 분야에 예타 면제… 조기 착공도 추진
“지역간 불균형 해소” 공감 속 “혈세 낭비 불가피” 우려도 커
정부가 투자부진과 건설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 대폭 완화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예타는 나랏돈이 300억원 이상(사업비 500억원 이상) 투입되는 도로ㆍ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을 건설할 때 사전에 사업성을 꼼꼼하게 따져보는 제도다. 정부는 지자체들이 신청한 약 60조원 규모의 SOC 사업 중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사업을 선정해 예타를 면제하는 한편으로 예타 실시기준도 낮춰 인프라 투자를 대폭 늘릴 계획이다. 그 동안 ‘SOC 감축, 복지 확대’ 기조를 고수해온 문재인 정부가 예타 완화를 우회로 삼아 과거 정부처럼 토목ㆍ건설경기 부양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17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확대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2019년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했다. 먼저 정부는 내년 1분기(1~3월) 중 예타를 면제할 대규모 공공투자 프로젝트를 확정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달 서울을 제외한 전국 16개 시도는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 33개 사업(약 60조원)을 예타 면제대상으로 신청했다. 이중 지역경제 파급효과가 크고 여러 시도가 경제적 이익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광역 SOC 사업을 중심으로 예타를 면제, 조기 착공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차제에 예타 문턱 낮추기에 나섰다. 예타 실시기준을 높이고(사업비 500억→1,000억원 이상) 낙후지역을 배려하기 위해 평가기준을 개선한다는 방침 아래 관련법(국가재정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예타는 △건설에 필요한 비용과 건설 후 발생하는 편익 중 어느 게 더 큰지(경제성 분석) △사업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지(정책적 분석) △지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지(지역균형발전) 등을 토대로 사업성을 평가한다. 이중 지역균형발전 평가배점(현재 25~35%)을 높여 경제성이 낮더라도 낙후지역 인프라 개선에 도움이 되면 예타를 넘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예타 제도 전반을 손질하는 방향엔 일정 부분 공감한다. 김용원 참여연대 간사는 “1999년 예타 제도 도입 후 사업비 500억원 기준이 20년째 그대로라 경제상황의 변화를 반영해 1,000억원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연섭 연세대 교수는 “현행 제도에선 서울처럼 인구가 많은 곳은 비용 대비 편익(B/C)이 높게 나오고, 인구가 적은 지방은 ‘경제성이 없다’는 식으로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많다”며 “예타가 지역간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어 배점 조정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예타 면제 조치에 대해선 “혈세 낭비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고용참사와 경기침체 코너에 몰린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예타 면제를 우회로 삼아, 타당성은 낮지만 즉각 삽을 뜰 수 있는 대형 SOC 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설부문 취업유발계수는 10억원당 13.9명으로 제조업(8.6명)의 1.6배에 달할 정도로 경기부양의 ‘즉효약’이다. 하지만 지난달 지자체가 예타 면제를 신청한 사업 중엔 △KTX 남부내륙철도(김천~거제ㆍ5조3,000억원) △신분당선 광교~호매실 연장(1조3,000억원) 등 이미 ‘경제성이 낮다’는 판정을 받은 사업이 많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팀장은 “토건 사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할 의도인 것 같은데, 나중에 재정누수 문제가 생길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정치적 고려가 예타 면제를 더욱 부추길 개연성도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13일 경남을 방문해 “(남부내륙철도는) 경남북 내륙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예타 면제를 곧 결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로 예타를 면제해주겠다고 나선 셈”이라며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예타를 면제하고 강행한 것과 동일한 프로세스”라고 꼬집었다.
예타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조사 결과를 강제할 수는 없지만 세금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SOC 사업의 무분별한 추진을 막는 문지기 역할을 해왔다. 1999~2016년 말 예타가 실시된 782건(333조3,000억원) 중 273건(136조9,000억원)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장은 “지금도 ‘타당성이 낮다’는 예타 결과를 받은 사업 중 60%가 그대로 추진되나 이 사업들은 분석자료라도 남는다”며 “SOC 사업이 국가안보처럼 시급한 사안도 아니고, 6개월~1년 분석 절차를 거쳐 시행하면 되는데 왜 예타를 면제해 제도 자체를 무력화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세종=박준석 기자 pj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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