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48>경북 영덕 영해면
영해면은 영덕 속 ‘작은 안동’으로 불린다. 그만큼 양반 고을의 기품과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해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영덕군에 합병되기 전까지 독립된 군(郡)이었다. 고려 태조 23년(940) 예주(禮州)로 불린 이후부터 인근 축산면ㆍ병곡면ㆍ창수면을 아우르는 지역의 중심이었다. 곡절 많은 근현대 100년의 시간도 1,000년 넘게 뿌리내려온 영해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영양 남씨 괴시마을과 8종가 인량마을
영해 읍내에서 해안 방향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괴시리 전통마을이 있다. 동해를 등진 산자락에 기와집 40여채가 옹기종기 이어진다. 앞에는 송천이 흐르고 뒤에는 망일봉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서향이지만 흙담으로 둘러진 황토 빛 골목이 뭉근하고 따스하다.
주차장 옆에 이 마을이 영양 남씨 집성촌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한국의 수 많은 성씨 중에서 영양 남씨는 뿌리가 명확히 알려진 독특한 성이다. 시조 남민(南敏)의 본명은 김충(金忠)이다. 중국 당 현종 때(신라 경덕왕 14) 안렴사 직책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 영덕 죽도(현 축산항)에 표착해 신라에 정착한다. 경덕왕은 그가 중국 여남에서 왔다 하여 남씨 성을 내리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한 후, 특별 보상으로 영양현을 식읍으로 내렸다. 그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축산항에 ‘남씨발상지’ 비가 있다.
영양 남씨 분파가 괴시리에 들어온 것은 1630년이었다. 마을 중심부에 터를 잡은 300년 된 괴시파 종택을 비롯해 영은고택ㆍ해촌고택ㆍ천전댁ㆍ임천댁ㆍ물소와서당ㆍ괴정 등 14채의 고택이 문화재 자료로 등록돼 있다.
예스러운 담장과 골목을 지나 마을 뒤편 산기슭으로 오르면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의 생가 터와 기념관이 나온다. 억지로 생가를 복원하지 않고 텅 빈 공간에 표석 하나만 남겨 오히려 여운이 오래 간다. 표석 뒤에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가 역시 동강난 그대로 누워 세월의 무상함을 증언한다. 가정은 목은의 부친 이곡으로 원나라 과거에 급제해 이름을 떨쳤다. 부친에 이어 원나라에 유학한 목은은 6,000수의 시를 남긴 당대의 문인이다. 그의 시와 문장 곳곳에 고향이자 외가인 괴시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목은이 원나라의 학자 구양현(1283~1357)과 주고받은 문장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온 어린 목은을 얕잡아 보고 구양현이 먼저 ‘짐승의 발자국, 새의 발자국이 어찌 중국까지 왔느냐’하고 운을 던진다. 이에 목은이 ‘어디 개 짓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리느냐’라고 응수한다. 구양현이 다시 한번 시험해 보려고 ‘술잔 들고 바다에 와 보니 바다 넓은 줄 이제 알겠느냐’하니, 목은이 ‘우물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 넓은 줄 모르는구나’라고 되받아친다. 이 일로 둘은 45세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지냈다. ‘괴시’라는 지명 역시 둘의 인연에서 비롯된다. 목은이 구양현의 고향인 괴시와 닮았다고 이렇게 부른 후부터 호지마을이던 이곳이 괴시마을이 되었다. 생가 터 옆 기념관에 목은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히 소개해 놓았다. 뒤편 솔숲에 조성한 산책로는 마을까지 연결돼 호젓하게 걸으며 사색하기 좋다.
창수면의 인량리 전통마을 역시 영해의 자부심이다. 괴시리가 영양 남씨 집성촌인데 비해 인량리는 8성 종가가 어우러진 500년 반가 마을이다. 용암종택ㆍ갈암종택ㆍ우계종택ㆍ오봉종택ㆍ삼벽당ㆍ충효당ㆍ만괴헌 등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사이에 지어진 ㅁ자형과 ㅡ자형, ㄷ자형 전통 가옥이 20여채나 있고, 이 중 여섯 채가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입향 순서대로) 대흥 백씨ㆍ평산 신씨ㆍ안동 권씨ㆍ재령 이씨ㆍ함양 박씨ㆍ무안 박씨ㆍ야성 정씨ㆍ신안 주씨ㆍ영천 이씨 모두 퇴계 학맥을 잇는 집안이다. 영해를 ‘작은 안동’에 비유하는 이유다.
집안마다 자랑거리가 넘치지만 ‘충효당’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만 소개한다. 재령 이씨 영해파 종가인 충효당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안동 장씨 장계향의 시가다. 부친은 퇴계 학맥을 이은 장흥효이며, 남편은 그의 제자 이시명이다. 종가의 기품은 호화스러운 건축물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조선 선조 때 지은 고택 옆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 장계향은 이 은행나무 아래에 커다란 솥단지를 걸고 묵을 쑤어 배 고픈 동네 주민들과 나누었다고 한다. 존중받는 반가의 내공이 엿보인다. 지금은 전설이 된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태백산맥 끝 줄기인 칠보산 자락에 둥지를 튼 인량마을 앞은 동해안에서 제일 넓다는 영해평야다. ‘어질고 또 어진’ 인량(仁良) 마을의 인심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근 벌영리의 메타세쿼이아 숲(벌영리 산54)을 함께 돌아보아도 좋다. 아직 번듯한 이름도 없는 15년 된 젊은 숲이지만 6,000그루의 나무가 뿜는 기운이 맑고 포근하다.
◇신돌석 장군과 영해의 독립운동
영해 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인근에서 가장 크다. 오일장(5ㆍ10일)이자 상설 시장으로, 물가자미ㆍ대구ㆍ문어ㆍ양미리 등 언제나 싱싱한 해산물이 넘쳐난다. 요즘은 대게와 과메기가 제철이다. 현지에서도 너무 비싸 선뜻 지갑을 열기 힘든 대게를 영해 시장에서는 조금 저렴하게 사는 방법이 있다. 조업 과정에서 다리 한두 개 떨어져 나가 상품가치가 떨어진 대게를 난전에서 일반 횟집보다 싸게 판매한다. 단, 바로 먹을 수는 없고 방앗간에서 찌고(약 6,000원), 스티로폼 상자(2,000원부터)를 별도로 구매해 직접 가져가야 한다.
시장의 공식 명칭은 ‘영해만세시장’이다. 1919년 3월 18일 영해 장날을 기해 인근 4개 면민 3,000여명이 장터에서 일으켰던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시장 한가운데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고, 시장 초입 로터리에는 ‘3ㆍ1 의거탑’이 있다. 지금도 매년 3ㆍ1절이면 만세대행진과 합동 추념식이 열린다.
양반으로서 혜택과 권리만 누렸다면 영해를 양반 고을이라 할 수 없다. 영덕은 229명의 독립운동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기초자치단체로는 안동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고, 인구 비례로 치면 으뜸이다. 그 중심에 유학의 덕목인 충절과 대의명분으로 기꺼이 떨쳐 일어난 영해의 양반들이 있었다.
영덕 출신 독립운동가로 가장 이름을 떨친 신돌석(1878~1908) 장군 역시 퇴계의 먼 후손인 육이당 이중립에게 글 공부를 배웠다. 많은 사람이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풍채 좋고 힘만 센 인물로 알고 있지만, 한시를 읊을 정도로 꽤 공부를 한 편이었다.
영해 읍내에서 3km 떨어진 축산면 도곡리에 신돌석 장군 생가가 있고, 부근에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사당 초입에 장군이 27세 때 평해 월송정에서 지은 한시가 커다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시대를 한탄하고 항일의지를 다지는 내용이다. 평민 출신으로 3,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북과 강원도 일대를 호령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늦은 편이었다. 1962년에야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됐고, 기념관과 유적지가 정비된 것은 사후 91년이 지난 1999년이었다.
영해 바닷가 대진항 인근에는 ‘벽산 도해단’이 있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부터 안동ㆍ함창(상주)ㆍ의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벽산 김도현이 경술국치로 더 이상 갈 곳이 없게 되자 망국의 땅에선 묻힐 곳도 없다며 바다에 몸을 던진 곳이다. 나라 잃은 선비의 충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블루로드’ 영덕 바다는 시리도록 푸르다.
영덕=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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