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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27 04:40
수정 : 2017.07.27 08:04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별은 혼자 빛나지 않아" 밑줄 치게 하는 이준익 영화

이 대사 그 장면/ 한 줄의 대사로 영화 전체를 말하는 능력 탁월

등록 : 2017.07.27 04:40
수정 : 2017.07.27 08:04

영화 '박열'은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더해 영화적 재미를 추구하기 보다 최대한 사실을 전달하려 한다. 메가박스플러스엠

새로운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어떤 소설인가요?”나 “소설의 줄거리가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다.

“직접 읽어보시지요.”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건 너무 무책임한 말 같고, 인터뷰를 하는 작가로서의 직무 태만 같기도 해서 어떻게든 설명해보려고 애쓴다. 내가 쓴 소설이고, 소설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설명만 하려 들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 많이 알아서 그렇다. 작가는 소설로 쓰여진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다. 버려진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고, 쓰려다 만 이야기도 알고 있고, 차마 쓰지 못했던 이야기조차 알고 있다. 독자가 읽은 소설의 줄거리가 1에서 시작해 5로 끝나는 이야기라면, 작가는 -8부터 12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다. 정리해서 설명하는 게 힘들 수밖에 없다.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소설가가 있다면 한번 시험해보길 바란다. “당신의 최근작 줄거리를 50자 이내로 요약해주세요”라고 요구해보시라. 십중팔구는 말을 더듬다가 포기하고 말 것이다. 말을 못해서가 아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자신의 소설로 가득 차고 마는 것이다. 중앙정보처리장치(CPU)가 짧은 시간에 마비된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잘라내는 사람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는 머릿속으로 이야기의 살을 계속 붙여나가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생각해두었던 모든 이야기를 해체해야 한다. 머릿속에 가득 찼던 거대한 이야기의 군살을 제거하고, 뼈를 발라내고, 독자들이 먹기 좋은 크기로(가끔은 일부러 먹기 나쁜 크기로) 분리한 다음 잘 포장해서 내놓는 게 소설가의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설가도 있을 것이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그런 소설일까? 그는 타자지를 길게 이어 붙여 만든 약 40m의 종이 위에다 3주 만에 소설을 완성했다. 하지만 잭 케루악도 소설을 완성한 후에 여러 차례 수정을 가했다. 머릿속에서 하든 종이 위에서 하든 잘라내기는 마찬가지다.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영화 ‘플레이어’에는 시나리오 작가들로부터 초안을 듣고 흥행 여부를 판단하는 그리핀 밀(팀 로빈스)이 등장한다. 작가들은 그의 책상 앞에서 자신의 머릿속 모든 이야기를 서너 줄로 요약해내야 한다. 그에게 ‘작가들의 이름으로 널 죽이겠다’는 협박편지가 도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수만 페이지의 내용을 서너 줄로 압축했는데, 퇴짜를 맞은 작가는 그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에게 복수의 역할을 맡긴다면 밀을 죽이는 대신 골방에 가둔 다음 수십만 페이지의 시나리오를 읽게 만들 것이다. 읽어도 읽어도 절대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읽게 만들 것이다.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을 사랑했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삶이 부풀려져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최근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을 보고, 줄거리가 아닌 한 줄의 대사가 영화 전체를 설명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조선인 최초의 대역죄인이자 역사상 가장 버릇없는 피고인이었던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다룬 ‘박열’에서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준 대사는 영화와 별반 상관 없어 보이는 한 마디였다. 가네코는 감옥에 갇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다. 그 글을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시적인 문구나 형용사는 쓰지 말아줘.” 가네코는 자신의 삶을 미화하지도 말고, 없던 이야기를 덧붙이지도 말라는 이야기를 짧은 대사로 전했고, 이 감독은 그 대사를 자신의 영화 스타일로 삼았다. 감독은 오랫동안 자료를 조사했고, 사실과 다르지 않은 영화를 찍기 위해 고심했다.

영화 '라디오 스타'는 스타 가수와 그의 매니저의 우정을 보여주며 이익 관계를 앞서는 인간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대사에 밑줄을 자주 긋는다. 강조할 곳은 확실하게 강조한다. 관객에게 친절하다 말할 수도 있고, 밀 앞에서 핵심 주제를 설명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영화 ‘라디오 스타’를 본 사람이라면 매니저 박민수(안성기)가 왕년의 스타 최곤(박중훈)에게 하는 대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별은 빛을 받아서 내는 거야, 대부분.” 관객은 박민수의 말을 듣는 즉시 ‘라디오 스타’라는 제목의 의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영화 '황산벌'은 명예 때문에 부질없이 목숨을 내놓는 인간의 허욕을 비판한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계백 처(김선아)가 함축적인 말로 주제를 일갈한다. “호랑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이 인간아.” 이보다 훌륭한 영화 소개가 또 있을까. 우리의 상식과 다른 전쟁, 가죽과 이름이 남지 않는, 자신의 명분 때문에 죽음을 재촉하는 우매한 인간의 전쟁을, 죽음 앞에 선 계백의 처가 비웃는다.

이 감독의 영화에 매번 감동하는 것은 무엇보다 등장인물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 때문이다. 그는 역사를 다루더라도 그 속의 인간부터 다룬다. 철학자 존 그레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류의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개별적인 사람들의 인생은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면, 이는 각 인생들의 알 수 없는 총합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삶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의 삶은 비참하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이 감독의 영화 속 한 줄 대사들이 감동적인 이유 역시 어느 순간 인류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듯한 감각을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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