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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코델리아의 대답

입력
2016.10.0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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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스승의 질문에 제자 베드로는 답한다. “내 마음은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베드로는 그 사랑과 헌신의 대가로 물질이나 권력을 받을 일이 없었다. 오히려 평생에 걸쳐 감당해야 할 힘든 사명이 맡겨질 것을 알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거친 사내였지만 그의 마음은 스승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웠다.

리어왕의 막내딸 코델리아는 마음보다 앞서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버림을 받는다. 과장과 거짓의 사랑까지 만들어서 표현하라는 아버지의 욕심에 교활한 언니들처럼 응하지 못한다. 달콤하게 내뱉기만 하면 되는 사랑 뒤에 오는 보상이 너무나 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더 힘든 사명을 받기 위한 베드로의 대답이나, 모든 것을 빼앗기는 코델리아의 대답을 찾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내 고향 일대는 개발이라는 광풍이 지나간 자리다. 조용하던 공동체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마을에 공장과 아파트가 하나둘 들어서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부터였다. 갑작스레 불기 시작한 도시화 바람이 몰아치자 땅값이 하늘을 찌르며 치솟았다. 개발업자들은 마을 사람들이 꿈에도 만져보지 못한 돈을 내놓으며 논밭을 인수하고 그 위에 대규모 아파트들을 지어나갔다.

급작스러운 도시화가 동네에 안겨준 막대한 부는 그만큼의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여기저기서 부모와 자식 간에 다툼이 일어났다. 타지에 사는 형제들이 모두 고향으로 몰려와 재산 분배에 팔을 걷어붙였다. 부모들은 고심에 쌓였다. 어느 자식이 내게 더 잘했지. 또 어느 자식이 앞으로 더 잘할까. 집집마다 현대판 리어왕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식들은 앞다투어 내가 잘 모셨니 네가 잘 모셨니 언쟁을 벌였다. 부모의 뜻을 하늘처럼 받들면 아무 일 없을 것을, 얼마 안 되는 재물의 차이에도 서로 등을 돌려댔다. 어느 집은 형제가 연을 끊고, 어느 집은 분배를 끝낸 부모가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모님 생신이 되어도 명절이 되어도 가족은 모이지 않는다. 결국 모두 쓸쓸하다. 그 자식의 자식들은 부모가 하는 행동을 눈여겨 봤을 것이다. 리어왕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대사 하나 바뀌지 않고 이어진다.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람들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더니, “너도 눈앞에 재물이 있어봐라” 하면서 다들 웃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물려받을 것이 없으니 정말 편하다. 무엇보다 우리 4남매 모두 코델리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리어왕의 비극은 내게서 막이 내려온다. 그대신 베드로의 다짐이 내 앞에 있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보다 피땀 흘려 부모 형제에게 큰 것으로 보답하는 것이 참된 인생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 하나가 과장되게 말하는 것이다. 코델리아의 언니들은 손쉽게 부귀영화를 얻었다. 인간의 비극은 거짓과 탐욕에서 건져낸 것들에서 비롯된다. 땀과 눈물로 얻은 것에는 비극이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한편 비극은 끝내 비극만은 아니다. 사랑을 잃고 나서 더욱 사랑을 알게 된다. 큰 것을 잃어보면 무엇이 소중한지 명확히 보인다. 뭔가를 잃지 않는 인생은 없다. 인생의 참되고 아름다운 것들은 반드시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 서글픔. 하지만 그 비극이 우리를 인간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는 것에 위안을 찾는다.

부모가, 친구가 “나를 사랑하니”라고 물어올 때, 우리는 상대에게 묻어있는 것들을 볼 게 아니라 오직 존재 하나만을 바라보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말보다 마음이 먼저 건너가야 한다. 말이 미처 못 건너갈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때로는 코델리아의 비극을 두려움 없이 껴안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굳이 “나를 사랑하니” 안 물어봐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그런 사랑을 우리는 일궈내야 한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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