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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6.07.05 15:31
수정 : 2016.07.05 15:31

[김월회 칼럼] 장편을 읽지 않는 사회

등록 : 2016.07.05 15:31
수정 : 2016.07.05 15:31

강의하다가 기회가 되면 꼬박꼬박 묻는 말이 있다.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데 크게 영향받은 책을 꼽아본다면.” 많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물음에 선뜻 대답하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다시 물어본다. “고전이 아니어도 좋고 소설이 아니어도 좋다. 영향 여부를 떠나 장편을 통독해본 경험은.” 시험이나 과제 수행 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읽은 경우 말고 자발적으로 읽은 경우는 가뭄에 콩 나는 형국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장편을 거의 읽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서구 근대문명이 진보이자 이상으로 당연시되던 근대 초기, 중국은 ‘서구 따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서구와 맞붙는 족족 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서구인을 도깨비나 오랑캐로 불러왔던 그들로서는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은 자신과 서구를 열심히 대조하면서, 중국에 무엇이 부족하거나 없기에 잇따라 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졌다.

그중 하나가 신화였다. 서구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로 대표되는 복합적 서사구조를 갖춘 장편의 신화가 있었는데 비해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신화는 분명 서구만큼 많았지만 그 모두가 단편적이고 구조도 단순했다. 이에 중국은 ‘장편’의 신화를 만들어낸 역량이 서구 문명을 우월케 한 요인의 하나라고 여겨, 여러 문헌에 산재해 있던 단편 신화를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장편으로 엮어내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근대를 만들어가던 이들은 자기들의 근대에 서구와 같은 ‘장편’ 소설이 없음을 통탄해 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와 중국 등지로 제국주의적 침탈을 자행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다만 국력이 그만큼 신장했음에도 가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장편 대작이 나오지 않음을 몹시 속상해했다. 하여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중편 ‘산시로’ 등 세 작품이 실은 한 편의 장편소설로 기획된 것이라는 억지를 부리기까지 하였다.

신화와 소설만이 아니었다. 건축적 구조와 체계를 갖춘 장편의 학술논저가 자신들에게 결여됐음을 인지하고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장편 학술논저를 생산하는 데 몰두하였다. 예컨대 중국의 ‘민국총서’에 실린, 1920년대부터 40년대 사이에 나온 천여 종에 달하는 장편 논저는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은 왜 서구 문명의 ‘장편’에 주목하고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문제시했을까.

잘 만들어진 장편, 곧 고전 급의 장편은 비유컨대 자동차나 항공기 산업 등에 해당한다. 이들은 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종합산업이라고도 불린다. 어느 한 분야의 기술이나 정보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기에 그렇다. 장편의 소설이나 논저 등도 그러하다. 특정 분야나 주제에 대한 지적 역량이나 단일한 감성, 한두 가지 직관만으로는 생산할 수 없다. 한 개인이 두툼한 분량을 탄탄하게 엮어내고 가지런하게 꾸려내며 알차게 채워내려면, 사회가 그만큼 다차원에 걸쳐 그 역량이 발달하고 성숙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이 필요한 바를 집약적으로 활용하여 장편을 구축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장편은 그것이 산생(産生)된 사회가 도달해 있는 문명의 높이와 넓이, 깊이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담긴 단편이 장편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단편은 갖지 못하는 덕목을 장편은 분명히 지니고 있고, 이것이 문명의 유지와 갱신에 더욱 유익하기 때문에 장편을 강조할 따름이다.

모든 고전이 그렇듯이 장편도 읽어가는 과정에서 진가가 발휘된다. 고전더러 지혜의 원천이라고 하는 까닭은 고전과 만남을 통해 읽는 ‘나’가 지혜를 생성해내기 때문이다. 고전에 담긴 지혜를 내 안으로 복사해올 수 있기에 그렇다는 게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고전과 나를 섞는 과정이 고전 읽기의 핵심이라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이를테면 문명의 유지와 갱신에 필요한 창의성이나 고양된 이성, 공공선(公共善)을 향한 사랑과 실질을 구현하는 실천지(實踐智) 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 속의 지식이나 지혜 그 자체를 습득하는 게 고전 읽기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지금부터라도 그래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도 아니다. 이미 2,300여 년 전 맹자에 의해 개진된 바 있다. 그는 당시의 대표적 고전이었던 ‘시경’을 읽는 방법으로 “이의역지(以意逆志)” 그러니까 “읽는 이의 마음으로 쓴 이의 뜻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독법을 제시했다. 경전이라고 해서 거기에 담긴 바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그것과 나의 섞음을 바탕으로 만남을 가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장편에 담긴 문명의 자양분을 ‘지금-여기’의 내게 필요한 것으로 전화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장편 독서가 입시와 스펙의 핵이 돼야 하는 까닭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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