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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불법사찰, 사즉생의 각오로 재수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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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불법사찰, 사즉생의 각오로 재수사해야

입력
2018.01.25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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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이다. 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 측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하루 앞둔 상황에서 책 한 권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저질러진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과 증거인멸 과정, 그리고 검찰의 부실수사를 정리한 책이었다. 책이 절판돼 서점에서 구할 수 없게 되자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책을 구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음날 구속된 걸 보면 영장심사 대비에 크게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책에는 김 전 비서관과 그의 상사였던 권재진 당시 민정수석에게 유리한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다. 김 전 비서관이 소속된 민정수석실에서 민간인 사찰을 담당한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경거망동을 견제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구속을 피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구하려 했던 그의 심정이 이해는 되지만, 정작 책에는 그의 발목을 잡을 단서가 될만한 내용이 훨씬 많았다. 검찰의 부실수사로 그 동안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책을 쓰는데 밑바탕이 됐던 A4용지 상자를 집 베란다 붙박이장에서 다시 꺼냈다. 검찰 수사기록 55책과 재판기록을 차근차근 넘겨봤다. 당시 수사결과를 보고 있자니 현재 드러나고 있는 진실의 총량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한 수준이었다. 실력이 없어서 수사를 못한 게 아니고 아예 안 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언론에서 불거져 여론이 들끓자 2010년 7월 서울중앙지검은 특별수사팀을 꾸려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특별수사팀까지 꾸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결과를 기대했지만 사상 최악의 꼬리 자르기 수사로 끝났다. 민정수석실의 압력으로 고의로 압수수색을 늦춘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수사과정도 문제였지만 결과도 참담했다. 불법사찰에 관여한 공직윤리지원관실 일부 직원만 처벌하는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됐고 청와대의 ‘청’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부실수사 지적에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해괴한 말만 남겼다.

그러나 장진수 전 주무관의 폭로로 증거인멸 배후가 청와대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검찰은 2012년 3월 또 다시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검찰로서는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번에도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을 처벌하는 선에서 수사를 끝내버렸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개입한 정황이 다수 발견됐지만, 검찰은 “민정수석실이 증거인멸에 개입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자신 있게 밝혔다. 그런데 6년이 지난 지금 김진모 전 비서관과 장석명 전 공직기강비서관 등 민정수석실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나. 당시 수사팀 관계자에게 부실수사가 아니었는지 따져 물었다. 그는 예상한대로 “당시로선 최선을 다한 수사였다”고 말했지만, 누구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검찰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쉽게 사용하는데, 두 차례에 걸친 수사결과를 보면 국민들을 이만저만 우롱한 게 아니다. 증거인멸 책임을 뒤집어쓰고 수감된 진경락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은 2011년 3월 7일 지인과의 옥중 면회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권재진 민정수석과 김진모 비서관, 장석명 비서관, 모조리 수갑 채우고 들어와야 해. 검찰부터 시작해서 싹.” 청와대 민정라인의 핵심 참모들은 물론 부실수사를 한 검찰까지 증거인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검찰의 ‘꼬리 자르기’ 수사가 청와대 민정과 이명박 대통령으로 불똥이 튀는 것을 막으려는 꼼수가 아닐까 싶었는데, 진짜 이유는 검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12년 4월 재수사를 앞두고 채동욱 당시 대검 차장은 “사즉생의 각오로 수사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그 때 그 말은 공염불이 됐지만, 지금 이 순간 검찰에 가장 필요한 말이다. 국민들은 세 번 속지 않는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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