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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이다만 먹고 살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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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이다만 먹고 살 순 없다

입력
2017.08.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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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국민들의) 막힌 곳을 뚫어주는 사이다 역할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5일 공정위 업무보고 자리에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기관으로 우뚝 섰다”며 한 말이다. 문 대통령은 이어 “갑을 관계를 개혁하고 업계의 잘못된 관행을 혁파하는 모습에 국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고 격려했다. 사실 프랜차이즈 가맹 본사의 갑질과 재벌들의 총수 일가 일감몰아주기에 대한 철퇴에 통쾌해 하지 않을 이는 없다.

공정위뿐 아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마치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다는 국민이 적잖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기념식장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세월호 기간제 교사의 순직 인정 등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보여줬다. 국가정보원ㆍ검찰ㆍ경찰ㆍ국세청이 ‘탈정치화’를 선언하고, 문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과한 뒤 위로한 것은 ‘이제 나라가 제자리를 찾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제1호 현장으로 인천공항을 찾아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도 없는 이의 한을 풀어줬다.

그러나 새 정부의 행보에 대해 한편으론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작 중요한 게 빠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경제의 주역인 기업이 무대에서 안 보인다. 정부는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를 ‘저성장의 고착화’와 ‘양극화의 심화’로 진단한 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중심경제’라는 새 경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해 경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지나도 한참 지났다. 경제의 중심은 이미 민간과 기업에 넘어간 지 오래다. 정부가 앞장서니 민간과 기업은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3류가 1류를 가르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실물 경제의 성장도 빠졌다. 가계의 실질 가처분 소득을 올려 내수를 살리고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소득 주도 성장’의 취지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작업과 병행될 때 의미가 있다. 전체적으로는 계속 성장하면서 분배도 더 공정해져야 하는 것이지, 성장은 멈춘 채 나누기만 하면 결국 모두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정부도 ‘혁신성장’이란 이름 아래 여러 방안들을 열거하긴 했다. 그러나 방점은 혁신보단 분배와 복지, 공정 등에 가 있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해 보인다. 제조업에 대한 중시도 찾아볼 수 없다. 경제의 또 하나의 축인 금융도 새 정부의 안중에는 없는 듯 하다.

기업과 성장이 빠져 있다 보니 한국 경제의 5년 후나 10년 뒤 청사진도 안 보인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린 실물 경제가 실종된 채 공정한 나누기에만 치중하는 형국이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고, 25년 전 수교 당시 우리와 상대도 안 됐던 중국은 이제 한국 상품들을 시장에서 쫓아낼 정도로 커졌다. 사이에 낀 우린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 대한 새 정부의 고민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다소 잔잔하고 지엽적인 이벤트에 집착하다 나무만 보면서 숲을 못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 세계 무대에서 목숨 걸고 싸워야만 하는 기업인들의 기를 팍팍 살려주는 국가적 노력도 부족해 보인다.

사이다는 시원하다. 그렇다고 사이다로 배를 채울 순 없다. 한국 경제가 급체에 걸렸다면 사이다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 판을 키울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이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문 대통령 스스로도 대선 후보 시절 사이다보다는 속이 든든한 고구마라고 하지 않았는가. 경제의 속을 채울 밥과 고구마가 필요하다. 사이다가 밥이 될 순 없다. 박일근 경제부장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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