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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위기의 기업, 꿈이 없는 기업가

입력
2016.04.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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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딸에겐 경영 참여를 못하게 하는 건 차별 같아 보이지만 배려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딸에게만큼은 험하고 더럽고 고생스러운 일을 맡기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겼다고 봐야죠.”

오너 일가 중 여성을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기로 유명한 A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기업 문화에 대한 변명처럼 들렸지만, 곱씹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석이기도 했다. 그는 “오너 2~4세들은 경영을 책임과 의무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친족간 경영 세습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 역시 선대에서 일군 기업을 잘 유지하고 키워 후대로 넘겨줘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않다는 의미다.

기업 경영은 전쟁과도 같다. 새로운 기술로 끊임없이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아야 생존할 수 있다. 최고경영자의 방심과 판단 실수 때문에 잘 나가던 기업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사례는 널렸다. 때론 기업 내부, 우리 편이라 믿었던 사람들과도 싸워야 한다. 더 많이 갖기 위해 형제끼리 원수가 되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배신하는 막장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차가운 피’를 가져야 한다.

기업 환경도 최악이다. 새로운 사업을 하려 해도 각종 규제가 발목을 잡고, 정부 정치권 지자체는 기업을 봉으로 아는지 틈만 나면 손을 벌린다. 인터넷을 통해 대륙 건너편의 유행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대라 옛날처럼 ‘선진 문물’을 베껴와 손쉽게 팔아먹기도 쉽지 않다. 사업 아이템이 마땅치 않아 돈을 쌓아 놓으면 투자를 게을리 한다고 욕먹고, 실적이 악화돼 인력을 줄이려 하면 일자리 창출이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다고 비판 받는다. 앞선 경영자들이 문어발식으로 확장해 놓은 계열사를 유지하기도 벅찬데 새로운 먹거리를 찾지 못한다고 눈총을 받고, 매출이 줄면 회사를 키웠던 아버지, 형과 비교하며 경영 능력을 의심받기도 한다.

이러니 “기업 못해먹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랑하는 딸 뿐 아니라 아들도 선뜻 떠밀지 못하는 게 기업 경영일수 있겠다.

각종 규제, 반기업 정서, 글로벌 경제 침체, 심각한 가계ㆍ기업 부채…. 기업 경영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을 꼽으라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었던 때가 과연 있기는 했을까. 주요기업을 창업한 1세대 기업가들은 변변한 기술도 자본도 없었다. 사업을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였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폭삭 망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들은 기업을 경영하며 꿈과 보람, 소명의식을 이야기했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이 활기에 넘쳐 일에 몰두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가 화차와 트럭에 만재되어 실려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러한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광경을 바라볼 때야말로 바로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1954년 대구에 제일모직 공장을 세웠을 때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권과 유착해 특혜를 받으며 기업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지만 그들은 사업을 통해 나라에 보답(사업보국)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졌다.

“해방과 함께 결심한 사업보국의 신념.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을 사면서까지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었다.”(이병철) “현대는 장사를 하는 단체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분투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화장품과 플라스틱 사업으로 큰 돈을 벌어 평생 먹고 살 수 있었음에도 “갈데까지 가보자. 그게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씌워진 굴레이자 소명”(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라 생각하고, 대북 사업을 통해 통일의 꿈을 키웠던 것(정주영)도 우리 기업가들이었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사업하는 방식도 바뀌어야겠지만 2~4세 경영자들도 아버지ㆍ할아버지의 꿈만큼은 되새겼으면 한다. 기업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일감 몰아주기, 주식 투자, 재테크를 통해 손쉽게 돈 버는 법에만 몰두하고 있진 않은지. 직원들을 고용해 공장을 돌려 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을 통해 기업가로서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기업 환경을 만들어준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한준규 산업부 차장대우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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