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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런 건 보수가 아니다

입력
2017.02.07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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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은 공허하고 무심했다. 나의 대답은 한겨울의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는 미세한 바람처럼 스러졌다. 수년 전,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였다. 그는 이른바 한국의 ‘보수세력’을 비난했다. 나는 보수는 나쁜 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보수는 나름 소중한 가치를 담고 있을 수 있다. 다만 현재 스스로 ‘보수’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런 보수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진보 지식인으로 불리던 그 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들은 듯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 전까지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보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가치관과 태도로 살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2000년대 후반 영국 대사관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한국에서 국회의원들이 런던을 방문했다. 노무현 정부가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보수 진영을 대변하는 집권 여당 국회의원들을 수행했는데, 내심 궁금증이 들었다. ‘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이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을까?

빅벤이 우뚝 선 템즈 강변의 의사당 정문 앞에는 기관총을 든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영국과 유럽 국가들은 테러 위협 때문에 평소 공공 시설에 대한 경비가 삼엄한 편이다). 내 옆에서 걷던 여당 의원이 갑자기 흥분해 소리쳤다. “저 봐! 영국은 의회를 저렇게 경비하잖아! 까불면 기관총으로 쏘는 거야. 저게 선진국이지!” 옆의 의원이 맞장구를 쳤다. “우린 개나 소나 국회에 다 들어오잖아. 그 동안 노무현이 때문에 통치자의 권위가 다 무너져 내렸어. 나라 꼴이 개판이야!” 경찰이 지키는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고 의회 안에 들어가니, 쇼핑몰처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옆의 누군가가 좀 뻘쭘하게 말했다. “어? 여긴 들어오니 다 열려있고 자유롭네…”

영국 보수당의 하원의장이던 존 헤이즈(John Hayes)가 이들을 맞았다. 논제는 주로 복지 정책의 방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다 보니 간간히 사담이 섞였다. 이를테면 “우리 같은 보수끼리 말이지만, 사실 가진 자의 입장에서 권력을 즐기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아니냐”는 뉘앙스의 말을 한국 의원들이 몇 번 건넸다. 통역하면서 상대에게 얕잡아 보일 노골적 표현은 걸렀는데, 헤이즈가 결국 ‘결이 다르다’는 눈치를 챘는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말했다. “영국에서 보수는 가진 사람이 가난한 자에게 더 베풀려는 진실된 노력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살 테니까요.” 화끈거리는 얼굴로 통역했더니, 한국 의원들의 표정이 벌레 씹은 듯 구겨졌다.

한참 지난 에피소드가 떠오른 이유는, 요즘 ‘진정한 보수’라는 말이 회자되어서이다. 한편으론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간의 체험을 통해, 한국에서 보수의 의미가 정치학적이거나 경제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안다. 반북 정서나 엘리트주의를 빼면 딱히 내세울 정치적 아젠다가 없다. 겉으론 시장을 옹호하는 것 같지만 국가주의적 개입에 무감각하거나 종종 그런 구조로부터 사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한국의 ‘보수’ 개념은 차라리 모종의 진화심리학적 태도에 가깝다. 적자생존 상황에서 메인 스트림에 붙어 권력과 지대를 극대화하는 생존전략과 태도. 그런 체화한 전략과 태도가 인간 사회에서 자랑스러울 게 없음이 앞으로 한국에서 분명해졌으면 좋겠다. 글로벌 스탠더드 이전에, 인간의 품격 문제이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상대가 그런 수준이면, 대항하는 ‘진보주의자’인들 수준이 높아질 리 없다. 인간의 역사를 추동할 변증법은 헛바퀴를 돌게 된다. 지금 한국사회는, 좋은 보수주의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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