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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답정너

입력
2016.09.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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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준말이다. ‘답정너’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묻는다. 요즘 ‘답정너’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런 행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원래는 인터넷의 카페나 게시판 등에서 질문의 형태로 자신의 외모나 몸매 등을 자랑하거나, 또는 경제력이나 학력, 직업, 능력, ‘스펙’ 등을 자랑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칭찬을 대답으로서 강요하는 행태를 비꼬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제는 언론이나 정치권에서도 종종 쓰이는데, 얼마 전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우병우 사건 특별수사팀에 대해 ‘답정너’ 수사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성주 군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드 배치는 박근혜 정권에 의한 ‘답정너’ 방식의 결정이다. 독재 국가 혹은 파시즘 사회의 정치 과정은 대부분이 일종의 ‘답정너’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여초 사이트(여성 사용자 비율이 높은 사이트)에는 답정너 스타일의 질문 글들이 있었는데, 이 글들은 주로 자기 얼굴이나 몸매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얼굴이나 몸매가 좋거나 혹은 적어도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을 본인들이 속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나, 어때?”라고 질문하는 방식을 통해서 미리 정해진 답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 답정너의 심리 구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답정너가 원하는 대로 칭찬하면서 대답했던 것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원하는 답을 강요해서 얻어내는 사람들을 ‘답정너’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그래서 ‘답정너’는 종종 ‘답정녀’와 혼동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답정너’의 질문이나 말들, 예컨대 “나 요즘 살찐 거 같아”와 같은 것은 일종의 ‘여자어’(사회언어학적으로 여자들이 잘 쓰는 말)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답정너’는 결코 여자어가 아니다. 직장인들의 입장에서는 ‘꼰대’들의 주요한 특징이 바로 ‘답정너’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훈련소에서 조교가 훈련병에게 묻는다. “야, 너희들 억지로 끌려 왔냐.” 군대 내무반에서 병장이 이병한테 묻는다. “야, 내 얼굴 김수현 닮지 않았냐.” 여기에서 정해져 있는 답은 “아닙니다”와 “병장님은 김수현보다 더 잘생겼지 말입니다”이다.

유행어로서의 ‘답정너’는 일방통행식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세상일에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있고 답이 아예 없거나 여러 개인 경우도 있다. 토론이나 합의, 또는 투표 등을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리 답을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 요즘에는 종종 ‘답정너’라고 부른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답정너는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난다. 민주주의에서는 서로 다른 사회 집단들이 갈등하고 경쟁한다. 어떤 문제든 간에 사전에 가급적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며, 이를 바탕으로 충분히 토론하고 숙의한 뒤에, 일정한 단계에서 투표를 통해서 결정한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소수는 다수에게 승복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소수의 권리와 의견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 투표를 통해서 정치, 사회적 갈등이 일단 정리되는 것이지만 갈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의 정치 체제나 선거 제도는 ‘답정너’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만든 10월 유신 체제도 ‘답정너’ 체제였다. 박근혜 정권의 정치 스타일도 ‘답정너’다. 아베와의 위안부 합의도 그렇고, 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그렇고, 노동법 ‘개악’도 그렇고, 사드 배치도 그렇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충분한 사전 토의는 전혀 없었다.

보통 인터넷에서 답정너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끝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 이들 중 일부는 “너, 나 질투하냐”와 같은 식으로 반발하기도 하고, 극히 일부는 귀엽게도 ‘아몰랑’ 하면서 도망가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에, 답정너로서의 박근혜 대통령은 어느 한 앵커를 이렇게 몰아붙인 적이 있다: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자는 거예요” 요즘, ‘답정너’ 대통령에게 시달리는 국민에게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친박 앵무새가 되든가 아니면 ‘불순 세력’이 되든가.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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