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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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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입력
2018.01.03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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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마흔이 넘은 후배 녀석 하나가 연애에 또 실패했다며 징징거린다. 엄밀히 따지자면 연애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봉짓거리만 하다가 끝났다는 것인데. 이제 그만 좀 방황하고 정착 좀 하는 게 어떠냐 묻자, 팜므파탈 같은 여자만 좋은 걸 어떻게 하냐고 도리어 신경질이다. 그럼 계속 봉짓거리나 하시든가. 파프리카 같은 여자 어디 없어요? 그럼 더 이상 방황 안 할게요. 또 파프리카 타령이다. 녀석의 이상형 파프리카는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 ‘파프리카’에 나오는 열여덟 살 ‘꿈 탐정’의 이름이다.

‘파프리카’는 쓰쓰이 야스타의 동명 SF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적인 SF 미스터리 에니매이션이다. 사람들의 꿈 속에 들어가 불안과 신경증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장치 'DC미니'가 도난 당한 후, 잇따라 다른 사람의 꿈에 침입해 악용하는 꿈 테러의 음모를 파프리카가 밝혀내고 해결한다는 이야기. 파프리카는 냉정하고 명석하고 차가운 스물아홉 살 정신치료사 치바의 또 다른 내면이다. 치바와는 다르게 대담하면서 발랄하고 즉흥적인 열여덟 살 소녀. 파프리카는 딱 그 소녀를 닮았다.

구운 파프리카와 함께 먹는 돼지고기. 천운영 작가 제공
구운 파프리카와 함께 먹는 돼지고기. 천운영 작가 제공

파프리카는 스페인어로 피멘토라 부른다. 콜럼버스가 중앙아메리카에서 카스카벨이라는 녹색 고추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을 향신료 후추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후추처럼 자극적이고 후추보다 얼얼한 매운 맛을 가진 이 고추를 후추라는 뜻의 피멘타와 짝을 지어 피멘토라 불렀다. 이름은 후추(Pimienta)로부터 비롯되었지만, 파프리카(Pimiento)는 피망과 함께 고추의 동족이다. 매운맛이 덜한 고추라고 할까? 그래도 고추는 고추. 단맛 뒤에 은근히 감겨오는 매운맛은 파프리카의 또 다른 내면이다. 파프리카 내면의 매운 맛은 파프리카 가루 피미엔톤(Pimienton)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스페인의 대중적인 음식 중에 파프리카를 채운 이라는 의미의 피미엔토 레예노(Pimiento Relleno)라는 것이 있다. 같은 이름을 쓰지만 전혀 다른 음식 두 가지. 하나는 생 파프리카에 밥과 각종 견과류, 말린 과일 등을 채워 오븐에 구운 요리이고, 또 하나는 파프리카를 구운 다음 그 속에 대구살이나 으깬 감자 등을 채운 요리다. 파프리카 안에 무언가를 채워 넣은 것은 같지만, 파프리카를 먼저 구워 채우느냐 채운 다음 굽느냐의 방식이 다르다. 그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나오는 건 물론이다. 그래서 가끔은 자세한 설명은 보지 않고 피미엔토 레예노를 주문한다. 무엇이 나올지 무엇을 채웠을지 궁금해 하면서.

구운 파프리카와 함께 먹는 돼지고기. 천운영 작가 제공
구운 파프리카와 함께 먹는 돼지고기. 천운영 작가 제공

구워서 껍질을 벗겨낸 파프리카는 당도는 높아지고 질감은 쫄깃하게 부드러워진다. 꼭 통조림복숭아를 먹는 느낌이다. 아주 달기만 한 건 아니고, 파프리카 특유의 알싸하고 상큼한 향이 남아 있어서, 스테이크와 참 잘 어울린다. 불에 직접 구워 탄내까지 가미되면 금상첨화. 그래서 돼지구이와 함께 곁들여져 나온 구운 파프리카에 탄 껍질이 조금 붙어 있는 걸 보면, 곁들이 음식이 아니라 메인 요리로 승격. 파프리카를 맛보기 위해 돼지고기를 조금씩 집어먹게 되는 것이다.

파프리카 맛의 정점은 가루에 있다. 아주 곱게 간 태양초 같은 느낌인데 자극적이지는 않다. 파프리카가루는 은근히 스며드는가 하면 대담하고 발랄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기의 잡내를 제거할 때나, 닭이나 돼지 통구이를 할 때, 은근슬쩍 스며들며 기를 살려 주는 존재. 올리브유에 끓인 새우(Gambas)나 삶은 문어 위에 듬뿍 뿌리면 익숙하면서도 뭔가 이국적인 맛이 난다. 헝가리 스튜 굴라쉬(Gulasch)는 치유의 느낌마저 든다. 모든 게 피미엔톤 덕분이다. 나는 파프리카가 아니라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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