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드러난 지 5년 만인 지난 2일 옥시레킷벤키저(옥시)가 공식 사과했다. 옥시의 한국법인 아타 샤프달 대표가 피해자 가족 앞에 고개를 숙이며 ‘포괄적 보상’을 약속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눈길은 싸늘하다. 검찰 수사를 통해 옥시가 1999년 제품 개발 단계부터 최근의 검찰 수사 직전까지 살균제의 위험성을 모른체하고 실험을 조작하며 검찰 수사까지 방해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기 때문이다. 17년간 이어진 옥시의 사건 은폐와 책임 회피의 정황들을 정리했다.
1.1999년 가습기 세정제 ‘흡입 독성’ 경고 묵살 의혹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의 인체 유해성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안전성 검증 절차를 생략하고 제품을 출시했다. (기사보기☞ 옥시, 제품 출시 전 해외 전문가 ‘독성 경고’ 묵살 정황)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은 옥시측이 ‘옥시싹싹뉴가습기당번’ 개발단계인 1999년쯤 독일 전문가로부터 가습기 세정제의 흡입독성을 경고하는 이메일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옥시는 별도의 흡입독성 실험을 생략하고 2001년 10월부터 문제의 제품 판매를 시작했다. 이는 옥시 측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입증을 위한 간접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 2011년 책임 덜 지고 폐쇄적인 유한회사로 변신
2011년 5월 정체불명의 폐질환 환자가 동시에 6명이 발생한 지 반년이 지난 11월 10일,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를 폐질환의 원인으로 확정했다. 이에 따라 옥시의 ‘옥시싹싹뉴가습기당번’을 포함한 6종의 가습기 살균제가 회수 조치됐다.
꼭 한달 뒤인 12월 12일, 옥시는 기존 주식회사에서 유한회사로 조직을 변경해 설립 등기를 했다. (기사보기☞ 옥시 ‘가습기 살균제’ 법인 책임 피하려 조직 변경)
유한회사는 외부감사 및 공시 의무에서 벗어나 주식회사보다 폐쇄적 성격을 띄며 파산할 경우 주주와 사원의 책임이 제한된다.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인 법인이 존속하지 않으면 ‘공소 기각’ 결정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2005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조직 변경으로 기존 법인이 소멸됐을 경우 형사책임이 신설 법인에까지 승계되지 않는다. 결국 임직원들이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영국에 본사를 둔 법인은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3. 2011년~2012년 유해성 실험 통제ㆍ연구진 매수 의혹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 미상 폐 질환의 위험 요인으로 판단된다”는 2011년 8월 질병관리본부의 역학조사 결과를 반박하기 위해 옥시는 2011년~2012년에 걸쳐 서울대와 호서대 연구팀 등에게 ‘살균제 유해성 여부’에 대한 실험을 의뢰했다.
그러나 독립적이어야 할 연구용역 실험은 옥시의 ‘통제와 주문’에 따라 이뤄졌다는 의혹을 받고있다. (기사보기☞가습기 살균제 유해성 실험 ‘업체 주문대로’)
검찰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의 공기 중 유해성을 측정한 호서대 연구팀은 옥시 직원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실험을 진행했고, 동물 흡입 독성을 점검한 서울대 연구팀은 기존 실험에서 10배까지 설정하는 최대 노출치를 ‘권장사용량의 4배까지 한정하라’는 옥시의 주문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연구팀을 매수했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다. 옥시는 연구용역비로 서울대에 2억5,000만원, 호서대에 1억원의 용역비를 각각 지급했다. 용역비와 별도로 두 교수의 개인계좌로 수천만원의 자문료도 송금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사보기☞옥시, 가습기 살균 연구교수의 계좌로 수천만원 송금)
4일 검찰은 서울대 조모 교수 연구실과 호서대 유모 교수 연구실 등을 압수수색하고 조 교수를 뇌물수수혐의로 긴급체포했다.
4. 살균제 유해성 보고서 은폐ㆍ유리한 의견서만 제출
옥시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거만 골라 검찰에 제출했다는 정황도 나왔다. 옥시는 서울대 수의대 연구팀에 쥐를 대상으로 한 생식독성실험과 흡입독성실험을 의뢰한 뒤 생식독성 실험에서 ‘임신한 쥐 15마리 중 13마리의 새끼가 죽었다’는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보고서를 쪼개 달라고 연구팀에 요청했다. 옥시는 이중에서도 ‘가습기 살균제와 폐질환 사이에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흡입독성실험 보고서만 받아 유리한 내용만 골라 검찰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보기☞옥시, 英병원에 의뢰해 받은 유리한 의견서만 제출… 본사 개입 정황)
5. 15년간 홈페이지에 올라온 부작용 피해글 삭제 의혹
2001년부터 옥시 홈페이지 고객상담 게시판 등에는 가습기 살균제 부작용을 호소하는 후기글이 올라왔으나,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옥시가 이를 무더기로 삭제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기사보기☞ ‘옥시, 가습기살균제 피해글 삭제 파문’… 檢, ‘증거인멸·살인죄’ 검토)
검찰은 옥시가 지난 1월말에서 2월초 사이 2001년부터 올라온 ‘옥시싹싹뉴가습기당번’ 관련 상품 후기나 호흡곤란 등의 각종 부작용을 호소하는 게시글 수백 건을 삭제한 증거를 확보했다. 검찰은 옥시가 제품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글이 게시되면 ‘일시적 현상’이라고 소비자들에게 대응해왔다고 밝혔다.
6. 검찰수사 직전 유해성 경고자료와 이메일 폐기 의혹
2016년 2월 검찰의 압수수색을 앞두고 옥시가 제품 유해 가능성을 표기한 공식자료를 조직적으로 폐기한 정황도 나왔다. (기사보기☞ 옥시, 10년치 유해성 경고자료 ‘조직적 폐기’)
검찰은 옥시가 살균제의 원료로 2011년 판매중단된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관련
2001년부터 10년동안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일괄 폐기한 정황을 지난달 20일 확보했
다. MSDS에는 PHMG를 유해물질로 분류하고 먹거나 마시거나 흡입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검찰은 옥시가 임직원들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대거 삭제하고 보고서 등의 서류들을 빼돌리는 등 증거인멸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사보기☞ 옥시, 檢 압수수색 직전 조직적 ‘증거인멸’ 정황)
기획ㆍ글=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그래픽=한규민 디자이너 szeehg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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