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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입력
2017.03.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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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집 ‘비행운’의 한 주인공은 하얗게 된 얼굴로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주인공은 어쩌다 젊은 나이에 빚에서 헤어나오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지극히 열심히 산 결과다. 한 세대 전에는 ‘아플 여유‘가 있었다. 아파서 청춘이 아름답고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몸이 피폐해서 정신이 아플 여유가 없다. 정신은 아픈 만큼 성숙해질 수도 있지만, 몸은 아픈 만큼 무너진다. 당장 빚에 시달리는데 정신의 방황은 사치다.

아직 사회에 진출할 나이도 아닌 콜센터 직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한 일은 ‘회사 대신 욕먹어 주는’ 일이었다. 대기업은 이런 질 나쁜 시스템을 협력사를 두고 처리하게 한다. 그리고 문제가 되면 뒤로 숨는다. 불량 고객들이 욕을 하거나 희롱을 해도 상담원들은 적극 대처할 수 없다. 불만 고객이 전화를 길게 하면 빨리 끊고 다음 콜을 받아 하루에 배당된 콜 수를 채우라고 상사가 다그친다. 근본 원인은 회사가 올바른 고객 응대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해서다. 바른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기업의 행태에 우리 젊은이들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콜센터에 전화할 때 교양 있는 고객이 되자고 외치기만 해서는 이런 악이 없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회사의 시스템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이익을 따지는 회사가 그것을 스스로 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법이 나서야 한다. 이렇게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은 것은 사회규범을 바로 세우는 데 게을리 한 결과다.

동시에 우리 모두는 인간에 대해 좀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 갑질은 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온다. 원래 가진 자는 없는 자를 이해하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돈을 무기처럼 휘두르면 자기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듯 보인다. 덜 가진 자는 가진 자에게서 뭔가 받아 내야 하기 때문에 가진 자를 이해하는 연습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의 점수를 매기자면 을이 우등생이다. 그러나 이 우등생도 상대적인 갑의 위치로 옮겼을 때 열등생이 되어 자신이 가진 무기를 휘두른다. 이런 악순환은 지금 나부터 끊기 시작해야 겨우 실밥 하나 터진다. 하나의 실밥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때문에 다음 실밥은 조금 더 쉽게 터진다.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걸 내가 먼저, 그리고 혼자 한다는 건 아주 큰 용기가 따르는 일이다. 그 용기와 추진력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있으면 생겨난다.

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는 것을 숫자로 보면 그저 한 사람의 불행일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숫자로 셀 수 있지만, 인간은 숫자로 세면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모든 세상이 닫힌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 전부다. 그것을 인지하면 한 사람이 콜 수를 못 채워서 자살했을 때 그저 한 사람이 안타깝게 죽었구나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일이 바로 나의 일이다.

지금 극심한 을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여. 결코 세상을 버리지 마세요. 우리가 세상을 떠날 이유는 육체가 수명을 다했을 때와 남을 살리기 위해 숭고하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대를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그곳을 버리세요. 그리고는 그대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른 곳에서 새롭고 작은 일을 시작하세요. 나도 그대가 버린 그 곳을 같이 버려 주겠어요. 소수가 큰 덩치를 따돌릴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겠어요. 그런 곳은 망해야 합니다. 결국 망하게 됩니다. 우리 서로 손을 잡고 약속합시다. 사악한 세상에 편입되는 것보다 아름답고 건강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냅시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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