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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BBK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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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BBK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입력
2011.12.2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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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가장 억울했던 이는 당시 서울 마포의 정청래 민주당 의원일 것이다. MB정권 출범 직후의 한나라당 태풍 속에서도 선전하던 그는 상대 측이 유포한 허위사실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초등학교에서 "교장을 자르겠다"고 폭언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으나 상황은 끝난 뒤였다. 그 때 아슬아슬하게 당선된 한나라당 후보가 강용석 의원이다. 이후의 행적을 보건대 아마 그 일이 없었다면 지난 국회는 조금 덜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공직선거법의 엄격한 규정은 이런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정치권의 합의는 물론이거니와, 선거 때마다 온갖 흑색선전과 유언비어에 시달려온 국민 요구에 바탕한 것이다.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에게 적용된 법도 바로 이 법이다. 그런데 이 법과 사법체계를 마음껏 조롱한 그는 영웅이 됐다. 사법부 신뢰의 표상으로 추켜졌던 이상훈 대법관은 한 순간에 정권의 주구로 급전직하했다. 이게 정당한가.

전혀 정당치 않은 대법관 공격

알다시피 상고심은 사실심리가 아니라 법률적용에 문제가 없는지를 따지는 법률심이다. 정봉주 재판에서 원심은 선거과정에서 명확히 사실로 결론 나지 않은 사안을 구체적 소명자료 없이 주장한 행위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대법관 등은 이 원심이 입법취지와 판례에 비춰 크게 법리적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근거 없이 상대후보의 재산의혹을 제기한 충주시장도 같은 논리의 판결로 시장직을 잃었다. 만약 이번에 다른 판단을 했다면 그게 도리어 법적 안정성과 일관성을 해치는 것이 될 뻔했다.

이 대법관이 진보진영의 칭송을 받았던 지난해 무죄판결과 이번 정봉주 판결을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판결 원칙은 언론의 비판기능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정봉주 판결은 짧은 선거기간에서 의혹제기는 유권자 선택과 직결되므로 구체적 입증을 필요로 하는 등 보다 엄격하게 규율돼야 한다는 공직선거법의 입법취지에 따른 것이다. 다른 영역인 것이다.

"정봉주가 유죄면 박근혜는 2~3배 징역가야 한다"는 주장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 당시 박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 세간의 의혹을 전하며 "매일 변명을 해야 하는 후보" 식으로 단정을 피해간데다, 결정적으로 상대진영의 고발도 없었다. 법적 판단이 이뤄질 여지조차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난 대선 관련 여러 재판에서 여야간 균형을 의심할만한 판결사례도 있으나 그게 이번 판결 부당성의 직접 논거가 되기는 어렵다.

오해는 말기 바란다. BBK 사건과 관련, 정 전 의원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BBK에는 도저히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들이 여전하고, 당시 검찰 수사결과는 지금 봐도 전혀 미덥지 않다. 4년 전 그저 정권교체만 하자며 대충 의혹을 넘겼던 많은 국민들도 묻었던 기억을 다시 꺼내고 있다. 마침 관련 고소도 제기된 판이어서 BBK문제는 갈수록 폭발력이 커져갈 것이다.

미래 또 암담케 하는 무분별문화

문제는 '정봉주 유죄=BBK 무죄' 식으로 사안을 싸잡아 한 덩어리로 보고 막무가내 흥분하는 습관이다. 기준은 그때그때의 감성적 반응이다. 그러다 보니 신뢰의 상징을 하루 아침에 천하의 쓰레기로 만드는 자기모순에도 개의치 않는다. 지난 정부에서 노무현 관련이라면 무조건 다 싸잡아 조롱하고 욕하던 떼 놀음이 결국 지금 그토록 혐오하는 이 정권을 탄생시킨 경험에 대한 반성도 없다. 동전의 앞뒤만 계속 바뀔 뿐 하나 다를 것 없는 반복이다.

다들 절감하듯 우리사회 곳곳의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시기다. 손댈 대상을 세심히 가려 외과의처럼 정교하게 해야 하는 작업이다. 정봉주 재판 파동에서 재연된 이 거친 무분별의 문화를 깨지 못하면 미래는 암담한 현실의 연장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깊은 병을 앓는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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