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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척, 멀쩡한 척...살인의 추억을 팔아 스타가 되다

입력
2014.12.2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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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좀도둑이 잔혹 범죄자로

26회 유죄 판결, 42년 수감

징집 피해 미친척 해 '매드 프랭키'

'범죄 은퇴' 후 위트ㆍ달변 유명세

매드 프랭키는 흉악한 전과자였으나 대중은 범죄소설을 즐기듯 그의 사연을 즐겼다. 그 팬덤은 연쇄살인마를 추종하는 병적이고 은밀한 숭배의식과 달리, 다분히 오락적이었다. 선량한 시민은 건드리지 않았고 악한 교도관을 응징했다는, 다분히 미화된 그의 일부 이력들에서 대중은 로빈훗의 낭만 같은 걸 느꼈을지 모른다. 그가 즐겨 구사하던 반어의 위트처럼, 그의 삶 자체가 반어적이었다. Crimecollection.com에서
매드 프랭키는 흉악한 전과자였으나 대중은 범죄소설을 즐기듯 그의 사연을 즐겼다. 그 팬덤은 연쇄살인마를 추종하는 병적이고 은밀한 숭배의식과 달리, 다분히 오락적이었다. 선량한 시민은 건드리지 않았고 악한 교도관을 응징했다는, 다분히 미화된 그의 일부 이력들에서 대중은 로빈훗의 낭만 같은 걸 느꼈을지 모른다. 그가 즐겨 구사하던 반어의 위트처럼, 그의 삶 자체가 반어적이었다. Crimecollection.com에서

이름 없는 좀도둑으로 시작해 영국 최악의 범죄자로, 또 말년에는 제 범죄의 추억을 팔아 컬트 스타 같은 관심 속에 살았던 ‘매드 프랭키(Mad Frankie)’, 프랭키 프레이저가 11월 26일 숨졌다. 향년 90세.

13살이던 1936년 담배를 훔치다 걸려 소년원 신세를 진 이후 89년 마지막으로 감옥 문을 나설 때까지 그는 절도 강도 폭력 등 26차례 유죄 판결로 42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혐의를 입증 못해 기소하지 못했거나 무죄로 풀어준, 살인을 비롯한 숱한 범죄 의혹들은 이제 그와 함께 영원히 묻히게 됐다. 아니 그의 악명을 떠받쳐온, 드러난 범행들조차 진실의 일부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온갖 이야기들을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과장하고 또 어떨 땐 얼버무리면서 그 모호함으로 자신을 치장했다.

프레이저가 런던 뒷골목을 실제로 누빈 기간은 10년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164cm 단신인 그는 상대 폭력집단 조직원들조차 소름 돋게 할 만한 잔인함으로 악명 높았다. 감옥에서도 교도소장을 폭행하는 등 물불 안 가리는 범행으로 징벌방과 병원을 드나들면서 형량을 늘리기 일쑤였다. 그의 엽기적 범행 수법들은 범죄 스릴러 소설이나 영화에 숱한 사실적 디테일을 제공했다.

은퇴 후의 그는 언터처블(Untouchable)의 이미지와 세련된 매너, 켄 브루언 풍의 하드보일드 소설에 그대로 갖다 써도 좋을 만한 기괴한 영국식 위트와 달변으로 TV나 극장 토크쇼 등에 수도 없이 불려 다녔고, 영화에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매드 프랭크’(2007)는 60,70년대 영국 범죄사의 뼈대로 평가 받는다. 엔터테이너로서 그는 자신의 범죄 인생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했고, 대중들은 그의 거짓말 같은 진실, 아니면 진짜 같은 허구를 소설이나 영화처럼 즐겼다.

그는 40여 건의 살인(교사) 혐의를 받았지만 기소된 건 딱 한 번이었다. 60년대 영국의 악명 높은 범죄집단 ‘리처드슨파’조직원이던 66년 3월, 프레이저는 조직이 관리하던 런던 남부 캣포드의 한 클럽(Mr. Smith’s club)에서 경쟁 조직 ‘크레이파’의 습격으로 허벅지 관통상을 입는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에게 총을 쏜 상대파 조직원 리처드 하트는 얼굴에 총을 맞아 숨진 상태였다. 프레이저는 살인혐의로 기소되지만 증거 불충분과 증언 번복으로 폭력 혐의만 인정돼 5년 형을 받는다. 훗날 프리랜서 작가 세트 린더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 싸움은 볼만했다. 근데 이놈이 총을 꺼내더니 내 허벅지를 쏘는 게 아닌가. 경찰은 내가 그 총을 빼앗아 그를 살해했다고 하더라. 사실이다. 그럼 거기서 내가 걔한테 잘했다고 등을 두드려주기라도 했어야 하나?”

그 일로 수감 중이던 67년, 리처드슨파의 쌍둥이 두목 가운데 형인 찰스 리처드슨에 대한 ‘고문 재판(Torture Trial)’이 시작된다. 찰스는 자신과 조직에 해를 끼친 자들을 납치해 고문하는 이른바 ‘사형(私刑) 법정’을 열곤 했는데, 거기서 그는 판사의 법복을 입고 ‘재판’과 흡사한 절차를 주관하곤 했다. 재판 과정은 대개 구타와 전기고문이었고 그의 판결은 칼로 자상을 입히거나 손등 발등에 총질을 하는 거였다. 프레이저는 조직의 돈 600파운드를 가로챈 베니 콜스턴이라는 한 클럽 업주의 이빨을 플라이어(겸자)로 하나씩 뽑은 일로 함께 재판을 받았다.

크레이파 조직원 에릭 메이슨이 납치돼 온 것은 65년 1월 이었다. 프레이저는 “뻣뻣하게 굴던” 메이슨의 머리를 손도끼로 찍고 그 상처에 손을 갖다 대게 해선 못을 박은 뒤 담요로 둘둘 말아 한 병원 응급실 앞에 던졌다. 다행히 메이슨은 목숨을 건졌다. 그 범행을 두고 프레이저는 방송에 나와 “사실 에릭이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는데, 그 날은 살짝 맛이 간 것 같더라”고 말했다. 자타공인 ‘미친 놈’ 프랭키가 피해자를 “맛이 간 놈”이라 할 때, 그 말이 웃기기 위해 준비한 대사인지 아닌지, 시청자들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타인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을 그럴싸하게 드러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고문재판에서 찰스는 25년 형을 받았고, 프레이저에게는 10년 형이 추가됐다. 그는 69년 와이트섬의 팍허스트 감옥 폭동의 주동자로 몰려 또 다시 재판을 받았고, 나중에 무혐의로 판결되긴 했지만 교도관 살인을 교사한 혐의로 5년 형이 추가 구형되기도 했다.

프랜시스 데이비슨 프레이저(Francis Davidson Fraser)는 1923년 12월 13일 영국 런던 남부의 슬럼 콘월로드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시장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청소부였다. 집은 가난했고 프레이저는 10살이 되기 전부터 불법 사설 마권업자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는 장녀인 에바(Eva)를 가장 따랐는데, 둘은 자판기를 부수거나 빈 상점의 금고를 터는 등 좀도둑질에 특히 죽이 맞았다. 그렇게 번 푼돈을 그는 엄마에게 갖다 주며 주운 돈이라고 했고, 엄마는 ‘행운의 아들’을 뒀다고 칭찬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는데, 그랬다간 아버지가 그 돈을 경찰서에 갖다 주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고 한 방송에서 말했다. 그는 “그 시절 깡패들은 여자나 아이들, 그리고 선량한 시민들은 건드리지 않고 저들끼리만 치고 받았다. 지금은 안전한 데가 어디 있냐”고 반문하곤 했다. 하지만 그 시절 그의 주업은 주로 동네의 가난한 가게를 터는 거였고, 주급 날인 금요일 은행 앞 날치기였다. 프레이저는 스타킹을 복면 대체용으로 처음 도입한 게 자신이고, 금요일 날치기도 자기가 만든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제2차 세계전쟁 기간을 자신의 벨 에포크, 즉 가장 아름답던 시절로 기억했다. 잦은 등화관제와 공습 사이렌으로 거리는 주인 없는 진열장이나 다름없었고, 경찰관도 드물었고, 장물을 처분하기도 더 없이 좋은 여건이었다는 거였다. 그는 “나는 그렇게 쉽게 항복한 독일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는 말을, 진심처럼 말하곤 했다. 당시 그에게도 징집영장이 나왔지만 그는 실성한 척 연기를 해서 입대를 면제받는데, 그의 실성 연기는 이후 법정에서도 두 차례나 먹혀 감옥 대신 정신 병원에 수용된 전력도 있다. ‘매드 프랭키’란 별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그가 심한 충동조절장애를 앓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평소에는 멀쩡하고 심지어 유쾌하다가도 일단 화가 나면 누구도 그 성미를 못 말렸고, 즉각 화를 못 풀면 나중에라도 어떻게든 보복했다. 21살이던 45년 셔루드베리 감옥에 있던 프레이저는 교도소장이 자신을 괴롭히자 그 자리에서 그의 흑단 곤봉을 빼앗아 폭행, 18대의 장형(杖刑)을 받았다. 51년에는 원즈워스 교도소 소장이던 윌리엄 로턴을 납치해 공원 나무에 목을 매다는데, 로턴이 부패한 공무원인데다 수감 중 자신을 부당하게 괴롭혀서 내린 ‘정의의 심판’이었다고 그는 강변했다. 나뭇가지가 꺾이면서 로턴은 목숨을 건졌고, 프레이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행위 가운데 하나로 저 일화를 떠벌리곤 했다.

그런 저런 일들로 건달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실력자 ‘빌리 힐(Billy Hill)’의 해결사로 발탁됐고, 56년 라이벌파 두목 잭 코머를 습격해 은퇴시킴으로써 빌리 힐을 ‘영국 암흑가의 제왕’으로 등극시킨 일등공신이 된다. 당시의 그는 ‘면도날 프랭키’로 통했는데, 그가 받은 건당 수고비가 50파운드였다는 설도 있고, 봉합수술 바늘 한 땀당 1파운드씩 받던 수고비의 평균이 50파운드 선이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프레이저보다 딱 일주일을 더 살고 별세한, ‘미스터 저스티스’란 별명의 전 영국 대법관 다이머드 도너반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미국 시카고 금주법 시절보다 56년 런던 상황이 더 나빴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살벌했던 런던 거리의 주역이 프랭키였던 셈이다. 찰리 리처드슨은 자신의 자서전에 “프랭키는 못 말리는 놈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그는 거물(rock)이었다”고 썼다. 프레이저가 그의 패밀리에 가담하기 전이었다. 60년대 그가 리처드슨파에 합류하자 한 건달은 “중국이 원자폭탄을 얻은 격”이라고 평했다.(가디언)

50~70년대의 주요 사건 가운데 그가 가담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사건으로 63년의 대열차강도(Great Train Robbery)가 꼽힌다. 그는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수배 중이어서 곤란했다고, 변명처럼 말하곤 했다. 훗날 그는 그 사건 주범인 토미 위스비의 딸 마릴린과 연인으로 지냈고 99년 아내 도린(Doreen)이 숨진 뒤 마릴린과 해로했다.

89년 출소한 프레이저는 “예전처럼 몸이 날래지도 않고 더 이상 차 유리창을 깨고 뛰어들 수도 없어”은퇴한다. 그리곤 방송계의 러브콜을 받는다. 그는 69년 파커스트 감옥 폭동 사건 때 그를 변호했던, 런던 암흑가의 역사(92)의 저자 제임스 모턴의 대필로 매드 프랭크: 범죄적 삶의 기억들(94년)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한다. 그는 모두 6권의 책을 냈다. 범죄사건이 터지면 ‘전문가’로 초청돼 논평을 하기도 했고, 96년 런던 영화제에 출품된 J.K 아말루 감독의 영화 ‘하드 맨(Hard Men)’에서 범죄조직 두목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팬들을 모집해서 자신의 주요 범죄 현장들을 마차로 안내하는 런던 범죄 투어까지 다니곤 했다. 제임스 모턴은 “악수를 청하거나 서명을 받으려는 이들, 키스하려는 이들도 많고, 택시 기사들은 인사 대신 경적을 울리기도 한다”고 프레이저의 자서전에 적었다.

2013년 6월 영국 스카이TV는 그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마지막 생존자(Last Stand)’를 주말 프라임 시간대에 방영했는데, 거기서 그는 세인들이 자신을 크레이 형제와 비교하는 것에 불만을 터뜨리며 자신은 가문의 ‘조력’을 일체 받지 못한 자수성가형 범죄자라고 주장했다. “내 아버지는 나 같은 자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을 정도로 극히 정직한 사람이었다. 가족 중에 단 한 명의 전과자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감옥에서도 혼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고, 그 가운데 막내를 제외한 셋은 이런저런 일로 전과자가 됐다. 방송에서 그는 “막내가 나를 실망시켰다”며 농담했다.

91년 그는 런던의 한 술집에서 괴한이 쏜 총에 얼굴을 맞는데, 경찰 조사과정에서 그가 보인 태도가 또 화제였다. 가디언과 미러지은 그가 경찰에 일체 협조하지 않았으며 자기 아들에게 “칼로 흥했으면 칼로 망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만 말했다고 전했다. 제 이름조차 ‘투탄카멘(묵비권을 의미하는 갱 은어)’이라 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오히려 반문했다는 보도(텔레그래프)도 있다. 반면에 뉴욕타임스와 인디펜던트 등은 “내 자서전과 방송으로 비리와 추문이 폭로될까 봐 두려워하던 경찰관이 벌인 짓”이라 진술했다고 썼다.

어쩌면 저 모든 엇갈린 보도가 모두 그의 진실일지 모른다. 그는 65년의 플라이어 린치에 대해서도 그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그 땐 경찰이 증거와 정황을 손쉽게 조작하던 때였고 실제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일수록 더 그럴싸하게 들렸던 시절”(인디펜던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책 홍보용 사진을 찍을 땐 플라이어를 든 험악한 표정을 자청해서 짓곤 했다. 수많은 살인 연루 의혹에 대해서도 그는 어떤 자리에서는 부인했고 또 어떤 자리에서는 얼버무렸다. 2000년 낸 또 다른 회고록 매드 프랭크의 일기에서 그는 “팬들이 내게 몇 명이나 죽였냐고 묻곤 한다. 나는 ‘경찰은 40명쯤 된다고 하더라. 어쩌겠나. 나는 경찰과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한다”고 썼다.

말년의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런던의 한 요양시설에 머물렀다. 87살이던 2011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의자를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던 한 수용자를 폭행하려다 법원으로부터 ‘반사회적 범죄 금지명령(ASBO)’을 받았다. 그가 사법당국과 맺은 마지막 인연이었다.

그는 골반과 다리뼈 골절로 수술을 받은 뒤 합병증과 체력 고갈로 11월 26일 숨졌다.

60년대 영국 내무성은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자로 그를 두 차례나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 94년 인디펜던트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그런 영예를 얻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폭력적인 건 맞다. 그걸 또 사람들이 좋아하고, 나는 출세도 했다. 나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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