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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의 길을 좇다 보니

입력
2015.12.0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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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나 모양 자식 못 낳는다 쫓겨나고, 샛서방 봤다가 쫓겨나고, 말 많다고 쫓겨나고, 손버릇 나빠 쫓겨나고, 시부모 마대서(마다해서) 쫓겨나고, 그저 나하구 똑같이 딱한 처자가 참 많을 것이로구만, 안 그런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요 인면수심이 따로 없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속사정은 딱하고, 한술 더 떠 세상이 야속할 법도 하다.

‘심청전’의 팜므 파탈, 뺑덕어미를 불러내는 초혼굿이다. 잠시 심봉사 마누라 노릇을 해 주고는 심봉사 황천길에 동행하던 중 목적지를 시오리 남겨놓고 노잣돈은 물론 봇짐까지 들고 내뺀, 고약하기 짝이 없는 여자다. 원전을 뒤틀고 패대기치는 포스트모던 바람을 선취한 것일까. 1986년 제 5회 국악대공연에 참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졌을 당시 안숙선(뺑덕어미), 김용배 사물놀이 등 국악계 스타와 홍원기 한명구 조상건 정진각 목화의 간판 배우들이 총출연했던 노작이었다. 3-4조, 4-4조를 근간으로 한 말맛이 저류에 굳건히 살아 있다.

그렇다면 왜 3-4, 4-4조라는 원칙인가? 노래꾼 뺨치는 실력으로 몇몇 사설을 읊어 보인 후 이렇게 말했다. “판소리, 산대놀이. 노동요 등 선조들의 고된 일상에서 힘이 돼 준 것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헐떡이며 일 해가다, 할 말이 생겼어요. 숨은 턱밑까지 차오르는데, 그 때 내뱉을 수 있는 짧지만 분명한 대사의 단위가 그것이죠. 우리에게는 언어의 최대 공약수예요.” 결과적으로 운문처럼 들리는 덕에 객석에 침투력까지 좋으니 무대 언어로서는 아주 훌륭한 도구라는 말.

“가장 무방비 상태로 전달돼요. 특히 ‘춘풍의 처’, ‘백마강 달밤에’, ‘템페스트’ 같은 무대(에서의 대사)를 보세요.” 목화레퍼토리컴퍼니에 두텁게 퇴적돼 있는 언어 혹은 음악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된 것은 판소리 전통을 다시 읽는 작업 덕이다.

백마강 달밤에
백마강 달밤에

1984년 MBC에서 현대화에 초점을 맞춘 판소리 작업의 일환으로 “창작 판소리를 조금 더 현대로 가져올 수 없겠느냐”며 창극을 제안, 거기 응하면서 본격적으로 열린 길이다. 당판소리의 거장인 만정 김소희까지 소개시켜 주며. 흥부전을 창작 판소리로 만들어 보라는 제안에 ‘박타령’ 이 만들어진 것이다. “맨 처음, 설흔 살 때 동랑 유치진 선생의 소개로 판소리 현대화 작업에 뛰어들며 많은 것 배웠죠.” 몰리에르의 작품을 우리 식으로 번안해 달라는 요청으로 ‘스카펭의 간계’를 만들었지만, 제대로 맛을 안 것은 바로 그 ‘박타령’에서다. 최초의 오태석식 판소리 작업인 셈이다.

하나의 가능성을 확인한 MBC는 내친 김에 현대화 작업을 보다 밀어붙여 보자고 제안해 왔다. 김유정의 ‘봄봄’을 신판 창극으로 환생시킨 동명의 작품이 극단 목화 단원들을 중심으로 한 음악극의 형태로 1986년 공연되기 이르렀다.

그에 앞서 1985년에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그에 의해 판소리 극으로 변신했다. 조상현, 왕기창, 김소희, 은희진, 성창순 등 제일의 소리꾼에 무용수까지 열댓명 출연한 대작이었다. “당시 재공연 못해 큰 아쉬움이 남죠. 제대로 하려면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거든요.” 이런 게 실은 오케스트라보다 중요한 문제라며 약간은 볼멘소리,

그에게 무대는 언제나 현재다. 판소리라는 그릇은 현재를 담아내는 믿음직한 매체였다. 영화 ‘강남 1970’ (Gangnam Blues, 2014)이 있기 전 오태석의 ‘뺑덕어미 굿판’이 있었다. 1986년 ‘심청전’의 뺑덕어미를 현대화, 강남 땅부자로 환생시킨 1986년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보이는 직진형의 무대로 평가 받는다. 시부모 박대한 여자, 행실이 음탕한 여자, 도적질한 여자, 남자가 여자로 전환한 여자 등 문제녀들이 집결한 무대로 당시는 찬반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주된 반대의 이유가. 요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오리지널의 훼손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고답적인 원전을 확 뒤집었어요. 개인적 흠집을 왜곡하고 과장시키는 우리 세태의 문제점을 뒤튼 작품으로 만들고자 했거든요.”

1987년의 ‘팔곡병풍’은 한국어에 내재한 음악성, 즉 판소리나 서사 무가를 소리에 얹어 보내는 발화 양식에 주목한 작품이다. 예를 들어 왕무당이 “걱정 없고 근심 없어 부부백년 해로하고”라며 매기듯 대사를 치면 무당은 “자손만대(子孫萬代) 부귀길창(富貴吉昌) 백대천손(百代千孫) 계계승승(繼繼承承)”이라 화답한다. 알 듯 말 듯 한 한문투의 말이지만 그 자체로서 훌륭한 리듬과 액센트를 달성하고 있다. 언어의 즉물성을 논외로 한다면 바로 랩(rap)의 이상이다. 우리말 속에 내재한 저 같은 운율성을, 우리 연극은 망각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의 무대들은 암묵적으로 따지고 있는 것 아닐까. 숭실대 장원재 교수는 그를 가리켜 “랩(rap)처럼 발화하는 대화법”이라 적확하게 일컬은 바 있다. 한편 운율과 장단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자신의 대사가 랩송의 모범이라는 견해에 대해 본인은 어찌 생각할까? “하기사 랩으로 못 볼 것도 없지만 랩이 갖고 있는, 끼리끼리의 은어로서의 성질은 내가 추구하는 무대 언어와는 다르죠.”

그의 무대에서 음악적인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춘풍의 처’를 보고 쓴 어느 네티즌의 관극기는 소박하나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요즘 젊은 세대의 감성을 가감 없이 포착하고 있는 듯 하여 그대로 옮긴다.

“연극이 시작되고 무대 한쪽에 악공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직접 연극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신선했다. 연극 내내 연극의 분위기를 살려주는 악공들의 흥겹고, 우울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처’가 마지막으로 ‘춘풍’과 한판 신나게 노는 장면은 배우들의 노래와 춤과 함께 장단이 어우러져 마치 우리 마당극의 놀음을 보는 듯 신명이 났다. 우리의 소리와 장단은 관객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배우들의 대사는 대부분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고전적인 단어와 문체여서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부자’나 ‘미물’들이 장단에 맞춰 시조를 읊듯한 장면은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흥겹게 느껴지던 부분이었다.”

“나는 항시 시행착오다. 일단 흔들어보자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명동성당 계단에다 오줌 싸면 난리 나는 것처럼. (나의 무대가)너무 파격적이라는 반응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었다.” 목화레퍼토리컴퍼니 제공
“나는 항시 시행착오다. 일단 흔들어보자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명동성당 계단에다 오줌 싸면 난리 나는 것처럼. (나의 무대가)너무 파격적이라는 반응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었다.” 목화레퍼토리컴퍼니 제공

우리말의 운율성만큼이나 중요한 자산이 사투리다. 실제 그는 ‘사투리연극제’라는 걸 만들어 요즘 사람들과 방언의 관계 양상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작품 중 일부는 특정 지방의 사투리를 두드러지게 내세웠다.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는 제주도 사투리에. ‘자전거’는 경남 사투리에, ‘만파식적’은 함경도 사투리에, ‘백마강 달밤에’는 충남 사투리에 뚜렷이 기대고 있다. “나의 무늬라고나 할까, 사투리는 관객들과 만나는 데 도움을 주죠.”

목화레퍼토리컴퍼니가 그동안 축적해 온 일련의 관극 소감에서 언어 문제에 대한 진술을 그대로 한번 옮겨본다. “오태석 선생님의 옛말 부리기는 어렸을 때 오징어짜발치기하고 놀다가 할배 할머니가 쓰는 철썩철썩 달라붙는 말들을 다 펼쳐놓는다. 새삼 느끼는 것은 연극은 말의 전달이고, 역시 구어이다. 말의 맛이 있어야한다. 마치 힙합에서 라임(rhyme)을 짜고 가사를 쓰는 것이 비유를 문학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듣는 이’에게 쏙쏙 박히게 써야하는 것처럼.” “최고였다! 일단 원작을 셰익스피어 책 중에서 가장 좋아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웠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삼국유사와 셰익스피어를 합쳐서 배경을 삼국유사에 나온 가락국기로 설정한 것도 새로웠고 원작보다 가볍고 밝았기 때문에 유쾌하게 끝까지 웃으면서 즐길 수 있었다.” 등등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했다는 그 리뷰들이 고맙죠.” 선생의 말이 췌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왜일까? 장병욱 편집위원 a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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