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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대통령의 절망, 대통령의 희망

입력
2017.02.1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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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한 잔 하시겠어요?

이 문장을 어디에서 보았더라…. 여기서 절망은 희망과 같은 의미임에 틀림없다. 한 잔의 절망이 지나가면 희망이 오지 않을까. 어떤 문인이 이토록 부정직한 글을 썼을까. 그럴 리가 없다면, 어쩌면 젊은 시절 끄적거린 내 습작 노트가 출처인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절망을 찾아 다니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절망은 좌절이나 불안과는 다른 것이어서, 완벽한 절망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에게 손톱만큼의 희망도 없겠는가. 근거 없이 절망을 혐오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 절망을 본 사람이 드문 이유다.

강원도 사북의 어느 갱도였다. 탄차를 타고 수평갱도를 한참 들어가, 덜컹거리는 승강기로 옮겨 타고 다시 수직 갱도 600m를 내려갔다. 거기서 얼마를 걸어 탄을 캐는 막장까지 거의 포복자세로 기어오르던 중, 일행은 모두 캡불(안전모에 달린 등)을 꺼야 했다. 무슨 사고 때문이었는데, 600m 지하 속의 어둠은 고체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눈이 퇴화하는 데 고작 몇 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한 잠시, 어둠은 무슨 액체처럼 꿀렁거리며 내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뱃속까지 까맣게 차오르며 모든 감각이 어둠 속으로 녹아 들었다고 느낀 순간 절망의 한 자락을 봤지 싶었다. 그러나 절망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딱딱하지만 물컹거리는 절망의 물성만을 겨우 느꼈을 뿐이다. 설령 누군가 운이 좋아 절망을 응시할 수 있었다 해도, 그는 미치거나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캡불이 켜졌을 땐 목 조름에서 풀려난 듯 숨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선 까만 탄가루가 함박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고인이 되기 전, TV 속 김근태씨를 보면서 그라면 절망을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당할 수 없던 고문 속에서 혹시 봉인된 어둠의 속살을 보지 않았을까…. 절망을 본 사람이 다 미치거나 죽는 건 아니라고 믿게 된 사연이다. 10여 년의 도주 끝에 자수한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교도소에서 김근태씨에게 사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쩌면 그도 절망을 보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고문기술자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한 그에겐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긍정할 손톱만큼의 희망조차 없어 보였다. 하느님을 믿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 지점에서 자기 철학을 시작한다. 절망을 본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에겐 죽음이 없어서 문제였다. 절망한 이의 유일한 소망이 죽음이라면, 죽음조차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 진짜 절망이 아닌가. 죽어야 하는데 죽지 못하고 자꾸 살아야 하는. 목사가 된 이근안씨는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고문이 얼마나 애국적인 일인지 하느님 품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죽음에 안착하지 못한 절망은 자꾸 겉돌며 희망과 혼돈을 일으킨다. 그래서 자신이 절망에 빠진 것조차 알지 못한다.

욕망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는 한 인간은 절망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부추겨도 좀처럼 절망하지 못한다. 실패를 모르고 성공만 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승자(勝者)에게 자기성찰 능력이 없는 이유다. 절망의 사전적 의미에는 ‘희망이 끊어진 상태’라는 뜻과 함께,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라는 뜻이 같이 있다. 첫 번째 의미를 지나 두 번째 의미에 이를 때 사람은 자기 성찰을 시작한다. 그래서 진짜 절망은 세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절망이어야 한다. 고문이 사라진 세상에 절망하지 않고 고문기술자인 자신에게 절망했다면, 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었으리라. 절망을 통해서만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절망은 소중하다. 내가 절망을 희망하는 이유다. 절망을 상상조차 못하는 이들. 박근혜와 친박당 그리고 많은 김기춘과 우병우들, 그들이 절망에 이르기를 기도한다. 그때야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이 생길 것이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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