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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이유 있는 아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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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이유 있는 아우성

입력
2015.12.1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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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진다. 세월호특조위의 첫 청문회가 열린 엊그제 ‘세월호 의인’으로 불리는 한 중년사내가 자신의 몸을 스스로 해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다. 마음 속에 쌓인 고충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기다리던 청문회의 지지부진한 과정이야 짐작 못 할 일이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은 가늠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는 지난해 사고 당시 수십여 명의 학생들을 구했으면서도 더 많이 구하지 못한 자신을 내내 질책하며 죄 아닌 ‘죄’를 품고 살아왔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버거웠을 그의 삶의 일부가 작게나마 눈에 밟힌다. 당장 위로가 될 만한 몸짓을 보낼 수는 없지만 내 삶의 일부가 심리상담 분야에 걸쳐있는 탓인지 그저 남의 일로 내쳐두기엔 너무 가슴이 아프다.

정확히 20년 전에 이와 비슷한 무게감에 몹시 허덕이던 순간이 있었다. 사진기자 초년병 시절 동료 사진기자들과 한 지방법원에 취재 나선 길에 전형적인 시골 농부 형상의 늙수그레한 노인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사고로 사망한 자신의 아들이 법원 판결에 의해 가해자로 둔갑했다며 홀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여느 지방법원마다 보는 일이라 무심히 여길 수도 있었지만 왠지 시선을 거두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해보는 듯 엇박자로 엉킨 구호가 서툴렀지만 외치는 노인의 눈빛이 너무도 간절했던 탓이다.

그냥 목이 터져라 외치는 목소리는 금세 갈라졌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북받치는 설움으로 토할 듯 요동치는 그의 몸짓은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다. 그의 격앙된 ‘호소’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었지만 내가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초점이 조금씩 풀려가는 그의 눈빛을 보면서 왠지 모를 불안감도 덩달아 일렁거렸다. 잠시 후 취재를 위해 이동해야 했던 나는 법원 청사를 향해 몇 걸음 딛다가 갑자기 등골이 섬뜩한 느낌에 다시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그 순간 벌써 복부의 맨살을 드러낸 채 한쪽 손에 번쩍이는 물건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칼 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 놀란 나는 머뭇거릴 여유 없이 본능적으로 노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깨에 걸치고 한 손에 든 카메라 장비들을 아스팔트 위에 내던질 새도 없었다. 간신히 그의 손목을 붙잡은 나는 중심을 잃고 땅바닥에 뒹굴었지만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도 이미 맨살을 파고든 커터의 칼 끝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주변의 도움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난 뒤 나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유 모르게 터져 나온 눈물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고 머릿속은 내내 혼란스럽기만 했다. 노인의 처지와 상황에 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책이 컸던 탓이었다.

그날로부터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충분히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은 자신의 일상에 충실한 작은 삶들의 의미 있는 ‘아우성’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당연히 훼손된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은 너무도 소중한 일이요 절차이다. 20년 전 기억 속의 노인과 지금 ‘세월호 의인’ 모두 일상이 지닌 가치를 되찾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작 이들의 이유 있는 아우성에 귀 기울여야 할 이들이 보이는 행태에 분노가 솟구친다.

책임 있는 자들은 도처에 널린 작은 ‘삶’의 가치에 귀 기울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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