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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세상을 그리다] 이웃집 소녀처럼, 우리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죽음

입력
2017.11.09 16:1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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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 볼이 발그레한, 이웃집 소녀 같은 죽음이. 마루벌 제공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 볼이 발그레한, 이웃집 소녀 같은 죽음이. 마루벌 제공

나는 죽음이에요

엘리자베스 헬란 라슨 글, 마린 슈나이더 그림, 장미경 옮김,

마루벌 발행, 42쪽, 11000원

환절기가 되니 어김없이 부고가 줄을 잇는다. 예정되었다 해도 짐작과는 매우 다른 이별과 마른하늘 날벼락 같은 소식이 독감처럼 밀려온다. 찬바람에 마른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빛 바랜 마른 잎을 미련 없이 훌훌 털어 내는 어쩐지 매정한 나무들과 온기 잃은 햇볕과 초저녁부터 짙게 깔리는 땅거미의 계절이다. 얄팍해진 달력에 남은 숫자, 휴대폰 화면에 뜬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갈피 잃은 마음이 이리저리 서성댄다.

연명의료결정법, 이른바 존엄사법 시행을 앞두고 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첫 존엄사를 선택한 이가 등장했다. 죽음에 대한 선택은 삶에 대한 선택이다. 품위 있게 죽을 권리란 결국 품위 있게 살 권리니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법을 검색해 본다. 이래저래 죽음이란 무엇일까 곱씹게 되는 계절이다.

“나는 죽음이에요.” 죽음은 검푸른 머리에 검푸른 옷을 입고 머리엔 흰 꽃을 한 송이 꽂았다. 동그랗게 뜬 푸른 눈, 홍조를 띤 볼, 길고 가는 다리. 엘리자베스 헬란 라슨이 쓰고 마린 슈라이더가 그린 그림책 ‘나는 죽음이에요’에서 죽음은 뜻밖에도 귀여운 소녀의 형상이다.

“삶이 삶인 것처럼 죽음은 그냥 죽음이지요.” 죽음이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들꽃 만발한 오솔길을, 서커스 천막 들어선 들판을, 새들이 지저귀는 나무 밑을, 집들이 빼곡한 마을을 지난다. 죽음은 성실하고 엽렵하고 싹싹하다. 나이든 이들을 찾아가 다정하게 부축하고, 솜털 같은 머릿결의 아이들을 찾아가 눈을 맞추고 손을 잡는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들판의 동물에게도, 풀에게도, 나무에게도 빠짐없이 찾아가 상냥하게 손 내밀고 곁에 머문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다가오는 것을 보기 위해 불을 밝히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지나치기를 바라며 문을 닫아요.” 그러나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내가 찾아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요.” 고통스러울지, 아니면 고요할지. 땅에 묻힐지, 한 줌의 재가 되어 멀리 날아갈지, 아니면 하늘로 올라갈지. 혹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을지, 그 끝은 어디일지… “궁금한가요? 내가 알려 줄게요. 나는 아무런 비밀도, 숨기는 것도 없어요.”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건만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고운 색감, 소박하고 정성스런 그림 속에서 세상은 단순하고 조화롭다. 저마다 다사다난하고 복잡다단할 인생이 뒤로 한걸음 물러난다. 곁에 있으면 힘이 되는 속 깊은 친구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책이다.

문을 열면 바로 그곳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 볼이 발그레한, 이웃집 소녀 같은 죽음이 속삭인다. “나는 죽음이에요. 삶과 하나이고, 사랑과 하나이고, 바로 당신과 하나랍니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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