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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25 14:00

[애니칼럼] 우리 동물원엔 ‘아이 러브 기아’가 산다

등록 : 2018.04.25 14:00

2009년 태어난 새끼 호랑이의 이름은 우리 지역의 프로야구 구단에서 따와 각각 '아이' '러브' '기아'다.

15년 전 내가 우리 동물원에 처음 왔을 땐, 대부분 동물들에 이름 같은 건 없었다. 초보 수의사였던 나는 동물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이름을 부르며 동물들에게 아는 체를 하고 싶었지만, 이름이 없으니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냥 “야, 기린아 이리 와!” 하기엔 왠지 친근감이 많이 떨어졌다.

나이가 찬 지금에도 몇몇 권위적인 선배들은 나를 이름 대신 “아야!” “어이!” “야!” 하고 부르곤 한다. 자기들 딴에는 그게 친근감 혹은 가까움 때론 권위의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듣는 이로선 나이를 떠나 그런 식으로 불림받는 건 항상 기분이 나쁘다. 그러니 내가 기분 나쁜 걸 동물들에게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에서 사막여우는 '이름 부름'의 참 의미를 따뜻하게 전달한다. 픽사베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사막여우가 나오는데, 이 사막여우는 작은 몸뚱어리에 귀와 눈만 커다란 정말 귀여운 동물이다.

사막여우는 어린왕자와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사막여우 캐릭터 ‘에디’ 때문인지 동물원에서도 굉장히 인기가 높지만 무척 만나기 힘든 동물이기도 하다. 역으로 이 인기 때문에 야생에선 오히려 밀렵 등 수난을 겪기도 한다.

사막여우는 물은 거의 먹지 않고 말 그대로 ‘이슬 정도’만 먹고산다. 될 수 있으면 이 여우가 먹이 먹는 건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작은 생쥐 같은 걸 입에 피까지 묻히며 먹는 걸 보면 좋은 이미지가 깨질 우려가 있다. 아무튼 거기서 사막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정해진 시간에 꼭 찾아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난 너에게 차츰 길들여질 테고, 길들여지면 너와 난 서로에게 세상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가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이 오면 난 동굴 안으로 달아나겠지만 네가 오는 시간이 되면 난 몇 시간 전부터 동굴 밖으로 나와서 초조하게 너를 기다리게 될거야.”

'어린왕자'만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간 간의 길들임에 대한 참 의미를 따뜻하게 전달해주는 고전은 아직 못 본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고전만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간 간의 길들임에 대한 참 의미를 따뜻하게 전달해주는 말은 아직 못 본 것 같다. 이름을 매일 불러주는 건 바로 이 길들임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이리라. 안타깝게도 몇몇 사람들은 아직도 ‘동물들을 길들인다’는 걸 소유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할 뿐이지만.

물범은 눈이 흑진주 같아 '진주'라고 불렀다. 성의 없는 듯 이름 짓는 건 좀 미안하지만 부르기는 쉽다.

내 나름대로 한 마리씩 이름을 지어 부르다 보니 이제 동물원 동물들의 반 수 이상은 제대로 된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기린은 원래부터 이름이 있었다. ‘밀레린’과 ‘아린’. 이 멋진 이름은 공모를 통해 붙여진 이름이라 역시 차원이 다른 고품격이다. ‘밀레니엄에 태어난 기린’과 ‘아름다운 기린’이라는 의미다. 최근 태어난 새끼 기린은 기린답게 눈이 아주 크고 예뻐 ‘초롱이’라고 지었다.

물범도 눈이 흑진주 같아 ‘진주’라 부른다. 하마는 영명 첫 글자를 따 간단히 ‘히포’라고 했다.  사실 이렇게 성의 없는 듯 이름 짓는 건 좀 미안하지만 부르기는 쉽다. 쌍봉낙타는 봉이 2개라서 ‘봉봉이’다. 돌이와 순이는 별 특징 없는 암수 동물들에게 흔히 붙인다. 단봉낙타 한 쌍은 ‘낙순이, 낙돌이’다. 그들 사이에 난 새끼 이름은 ‘단붕’이다. 

붉은 캥거루 이름은 원래 호주에서 애칭으로 불렀던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고향에서 불렸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경우도 있다. 붉은 캥거루 수컷은 ‘부머’, 암컷은 ‘블루’, 새끼는 ‘조이’다. 호주에서 불렸던 애칭을 그대로 인용했다. 코끼리들은 동남아에선 집안의 한 재산이니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이름을 붙인다. ‘쏘이’ ‘봉’ ‘템’ ‘짠디’처럼. 원래 그들이 태어난 라오스와 태국에서 붙여 온 이름이다. 그들 중 쏘이와 봉이 각각 새끼를 낳았을 때 우리 동물원에서 탄생한 걸 기념해 수컷은 우치동물원의 ‘우치’ 암컷은 우리 코끼리라 해서 ‘우리’라고 지었다. 

성격 그대로 이름을 짓기도 한다. 에조불곰 두 마리는 어렸을 때 하도 겁이 많아서 암컷을 ‘어리’, 수컷을 ‘버리’라고 불러서 ‘어리버리’가 한 쌍의 이름이 되었다. 관람객들은 이 이름을 무척 좋아한다. 

세 마리 새끼 호랑이의 이름은 합쳐서 ‘아이, 러브, 기아’이다. 우리 고장 프로야구 구단인 기아가 그들이 태어난 2009년에 너무 잘해서 응원하다 덜컥 붙인 이름이다. 덕분에 그 세 마리는 코리안시리즈 개막전에 10번째 선수로 데리고 나가 우승의 기운도 한껏 불어 넣어주었다.  

그 많은 새와 파충류도 이름을 다 불러주면 좋으련만 아직 거기까지는 한계다. 물론 그들에게도 차츰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줄 생각이다. 몇몇 파충류, 조류 반려인들을 보며, 이름을 부르면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진다. 

혹시 동물원에 와서 마음에 드는 동물을 봤다면 이름을 지어 불러주기를 권한다. 그럼 동물원에도 당신을 기다리는 동물이 생기는 거고 당신 또한 그들을 더 자주 찾게 될 것이다. ‘이름 불러주기’는 인연을 만들기 위한 작지만 소중한 첫 역사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글ㆍ사진 최종욱 야생동물 수의사

(광주 우치동물원 수의사, ‘아파트에서 기린을 만난다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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