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성
논설실장

등록 : 2015.04.20 18:19
수정 : 2015.04.20 21:54

[이계성 칼럼] 박 대통령의 운(運)과 기(技)

등록 : 2015.04.20 18:19
수정 : 2015.04.20 21:54

위기마다 잘도 버텨 온 정치적 맷집

부메랑되어 돌아온 부패척결 사정

운 기대지 않은 위기극복 기량 있나

페루 동포 만찬 간담회

페루를 국빈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19일 오후(현지시간) 페루 리마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적 맷집이 상당히 좋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운 내지는 그로기 상태가 될 뻔한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버텨왔다.

올해 초 문고리 측근 3인방을 감싸고 돈 신년기자회견과 연말정산세금파동이 겹쳐 한때 20%후반까지 지지도가 급락했다. 임기 3년 차에 들어서자마자 레임덕 상태로 주저앉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곧 지지도가 반등해 40%대를 회복했다.

그것도 이완구 총리후보자 인준 파동을 거치면서도 이룬 지지도 회복이었다. 박 대통령 스스로도 자신의 정치적 맷집을 재확인하고 자신감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권 3년차에 기반과 기력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박 대통령의 든든한 보루여야 할 여당은 비박 비주류가 장악했다. 힘을 보태기보다 빼는 일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구도다. 밖으로는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과 피로도를 등에 업은 야당의 공세가 날로 거세졌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반전의 고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부패척결 사정(司正)의 칼은 그래서 빼 들었을 것이다. 정권마다 출범 초기 기강을 잡기 위해 또는 정권 위기 시에 레임덕 차단용으로 으레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곤 했다. 박 대통령도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세월호 참사 등으로 여건이 받쳐주지 않아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다. 역대 정권의 기획 사정이 대개 부메랑으로 정권에 되돌아 가거나 뒤끝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박 대통령에게 그런 걸 돌아볼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이 총리를 앞세운 게 문제였다. 이 총리는 취임 한 달 즈음 갑자기 부정부패척결 관련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뜬금 없다는 반응이 많았으나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 이뤄졌다는 게 분명해졌다. 닷새 후 박 대통령은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이번에야말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 그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비리의 덩어리를 드러내야 한다”며 이 총리가 깃발을 든 부패척결을 독려했다. 각 부처에 향후 30년의 성장을 위한 토양을 새롭게 한다는 각오로 부패척결에 범정부적 역량을 결집해 달라는 주문도 했다.

그러나 첫 사정대상에 오른 경남기업의 성완종 전 회장이 죽음으로 저항하면서 일거에 구도가 흐트러져버렸다. 사정 대상 1호가 되어야 할 사람이 무슨 사정이냐는 말 한 칼에 부패와의 전쟁 총사령관을 자처한 이 총리가 치명상을 입었다. 시차를 두고 가해진 공격에 목숨이 경각이다. 성 전 회장의 리스트에 포함된 나머지 7인도 독화살을 맞은 듯 시시각각 의식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공격의 후폭풍은 결국 박 대통령을 향할 수밖에 없다.

정 다급하면 총리야 바꾸면 되지만 전ㆍ현직 청와대비서실장, 대선 경선과 본선 캠프 핵심 측근들은 박 대통령의 지체나 다름 없어 잘라낼래야 잘라낼 수도 없다. 수 많은 위기를 거쳐온 박 대통령이지만 이번엔 정말 어렵다. 박 대통령은 남미순방 출국 직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이번 일을 부정부패를 확실하게 뿌리뽑는 정치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내친 걸음, 정면돌파다.

그러나 드러난 리스트를 그대로 처리하면 정권의 기반이 무너질지도 모를 만큼 타격이 크다. 그래서 야당 쪽을 끌어들여 물타기를 하려는 기류가 역력하다. 하지만 그 경우 수술해야 할 환부가 너무 넓어진다. 정치판이 완전 마비가 될지도 모른다. 야당과 국민여론이 쉽게 납득하지도 않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그 동안 헤쳐온 위기상황을 돌아보면 대개 운이 따른 경우가 많았다. 시쳇말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박 대통령 맷집의 비밀도 알고 보면 운에 기댄 측면이 컸다. 그러나 이번에는 돌아가는 판이 운에 기댈 상황이 아니다. 설사 또 어떤 운이 따라줘 임시봉합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은 임기는 아무 일도 못하는 식물정권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운 아닌 기량으로 이번 위기를 극복할 수는 있을까. 지금 국민들의 관심은 박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성과 보따리가 아니라 바로 이 같은 근본적 자기반성이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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