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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소년한국일보

입력
2017.07.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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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의 갈피를 넘기다 보면 소년한국일보가 펼쳐진다. 이른 아침 초등학교 정문 앞에선 검은 교복에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고등학생 누나가 신문을 팔았다. 문구점의 오락기보다 그 누나 앞으로 아이들이 더 많이 몰렸다. 허리에는 앞치마 비슷한 전대를 하고, 왼쪽 팔목에 신문 몇 부를 걸쳐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앞다투어 신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신문에서는 학기 초에 받는 교과서와 같은 기대와 설렘의 냄새가 났다.

신문을 파는 누나는 매일 오는 게 아니었고, 아이들 주머니에 돈이 들어있는 날은 더 드물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쉽게 교문을 들어서지 못하고 신문 주위를 서성거렸다. 몸을 비틀고 고개를 숙여 신문에 있는 만화 한 컷이라도 보려는 아이도 있었다. 페이지를 넘겨보려고 손을 대는 아이가 있을 때도 그 누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간밤에 잠이 모자랐는지 크게 하품을 하곤 했다. 신문을 팔고 나면 오후에 학교에 간다고 했다.

나는 군것질을 하는 대신 신문을 자주 샀다. 그건 내가 군것질 욕구를 잘 참아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구멍가게를 했기 때문에 군것질 자체에 큰 흥미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신문을 자주 사는 VIP 고객이라 그랬는지, 그 누나는 가끔 사은품으로 책받침이나 필기구 같은 것을 주었다. 인기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사은품 책받침을 너무 아낀 나머지 제 용도로 쓰지 못하고 책상 앞 벽에 액자처럼 걸어 두었다. 신문이 가져다 주는 행운은 또 있었다. 광고란에 어린이 잡지가 실리면 그 광고를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이것을 간절히 사고 싶다는 호소문 격이었다. 그러면 우리 집 누나들이 자기 용돈을 헐어 그 잡지를 사다 주기도 했다.

내가 신문을 사면 금방 내 주위로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친한 친구들과 신문을 나눠서 읽으면 그 친구들 옆으로 아이들이 연이어 따라 붙었다. 신문을 파는 누나는 ‘너희들도 사서 봐라’라는 말 대신 또 다시 길게 하품을 했다. 교문에서 교실까지 이어지는 신문 애독자들의 장엄한 행렬을 따라 학교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이 되면 구겨지지 않게 곱게 접어 놓았던 소년한국일보를 책상 위에 펼쳤다. 숨은그림찾기는 우리들 사이에서 단연 최고의 인기를 차지했다. 그림 아래 이런 류의 문구가 있었다. ‘몇 분 안에 숨은그림 몇 개를 찾으면 1학년 실력, 그보다 몇 개를 더 찾으면 4학년 실력, 몇 개 이상을 찾으면 6학년 실력.’ 그 문구에 걸려든 우리는 진지하게 너는 몇 학년, 너는 몇 학년 하면서, 친구를 놀려 대기도 부러워하기도 했다.

숨은그림찾기도 연재 만화도 재미있었지만, 나는 서울이나 해외 대도시의 풍경이 실린 지면을 아꼈다. 소년한국일보는 시골 소년이 드넓은 세계로 걸어가는 첫 관문이 되었다. 내가 커서 해외를 드나들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어릴 적 봤던 신문이 생각났다.

종이신문은 정보를 전하는 매체를 넘어 지극히 인간 친화적인 생활 필수품이었다. 내가 읽었던 소년한국일보는 갑작스런 소나기가 쏟아지는 하굣길의 우산이었고, 냇물에 떠내려 보내던 종이배였고, 겨울바람을 헤치며 달리던 바람개비였다. TV를 보러 우리 집에 몰려온 동네 사람들이 마당에 깔고 앉는 방석이었고, 어린 강아지들에게 겨울을 이기는 따뜻한 장판이었다.

지금의 아이들이 종이보다 금속의 기계에 익숙하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해도 조금 더 현명하게 정보의 세계에 다가가도록 하는 방법은 있을 것이다. 책은 당연히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종이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 습관 역시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는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가 있으니까 곧바로 어린이 신문 구독 신청을 해야겠다. 어릴 적 내가 품었던 넓은 세계를 아이도 품게 되리라.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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