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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청탁금지법, 어쩌면 축복

입력
2017.09.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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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금지법 마련을 주도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청탁금지법 마련을 주도한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내년 또는 내후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탈리아를 넘어선다. 두 나라 인구와 국내총생산(GDP) 흐름을 볼 때, 원화 가치에 급격한 하락만 없다면 추월은 확정적이다.

이는 한국이 1인당 소득에서 주요 7개국(G7), 과거 서방선진 7개국으로 불리던 나라를 따라잡는 첫 사례가 된다. 1990년 이탈리아 1인당 소득은 약 2만700달러로, 한국(6,500달러)의 3배였고, 독일(2만 171달러)보다 많았다. 1인당 소득이 많다고 삶의 질이 낫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성장의 대략적 추이를 보여주는 지표로 참고하면 좋겠다.

우선 이탈리아에 초점을 맞추자. 이탈리아는 어쩌다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에게 역전을 허용한 ‘잠자는 토끼’가 됐나? 물론 인구 6,200만, GDP 1조8,000억 달러 경제대국의 부진을 한두 가지만으로 설명할 순 없다. 인구구조, 산업구성, 역사, 노동시장 특성, 정부 효율성 등 갖가지 요소들이 영향을 준다. 다만 여러 연구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 나라의 부패 문제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매긴 부패인식지수에서 이탈리아는 176개국 중 60위다. 요르단(57위)보다 못하고, 그리스(69위)와 함께 유럽 최하위권이다. 여전히 마피아는 이 나라 GDP의 10%를 가져간다. 이탈리아 감사원은 부패의 경제적 손실을 연간 600억 유로(80조5,000억 원)라 추산하는데, 한 해 국방비(279억 유로)의 2배 이상이다. 정치인의 부패를 일종의 ‘무능하지 않음’으로 보는 독특한 시각은 부패 끝판왕(베를루스코니)이 총리를 세 차례(10년)나 지낼 수 있었던 토양이다. 이코노미스트지 로마 특파원 존 후퍼는 저서 ‘The Italians’에서 “이탈리아는 부패에 대한 법적 제재가 상당히 미약하다”고 지적했다.

부패는 번영을 갉아먹는다. 불필요한 통행료 탓에 사회적 비용이 오르고 그 대가는 전 구성원이 진다. 능력보다 인맥ㆍ학연이 중시되기에, 효율성은 떨어진다. 청렴한 나라가 모두 번영하는 것은 아니나, 삶의 질 높은 나라치고 청렴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미안함을 무릅쓰고 다른 나라 허물 얘기를 한 것은 한국이 반면교사 삼을 부분이 많아서다. 한국도 부패인식지수 52위로 이탈리아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우여곡절 끝에 청탁금지법을 통과시켰다. 법 시행 1년을 맞아 3ㆍ5ㆍ10 규정을 풀자는 목소리가 있다. 세상을 더 매끄럽게 만들 ‘윤활유’가 너무 짜다는 얘기다.

하지만 윤활유가 적다는 것까진 적응의 문제라 쳐도, 청탁금지법이 경제를 망친다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다. 특정 업체나 세부업종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청탁금지법이 내수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 근거는 찾기 어렵다. 아껴진 밥값, 선물값은 다른 소비나 투자에 쓰이기에 전체 소비성향까지 낮아지진 않을 거다.

이제 겨우 1년이다. 쓰레기 분리수거, 고속도로 안전띠, 버스ㆍ열차 금연이 처음엔 불편했던 것처럼, 3ㆍ5ㆍ10에 적응하는 데 다소 시간은 걸릴 것이다. 임기응변이 아닌 시스템에 의존해야 할 만큼 경제 덩치가 커진 이 때, 부패 경계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일 지 모른다.

성영훈 전 국민권익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공직자 외에 일반 시민까지 ‘이거 해도 되나, 받아도 되나’란 인식을 하게 된 게 청탁금지법의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사람을 대할 때 3만원, 5만원을 신경 쓰고 사는 삶은 다소 피곤하거나 삭막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경계와 주의가 사회를 더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만든다. 공직자가 절제를 체화하고 국민이 청탁의 무서움을 몸소 느낀다면, 한국이 이탈리아를 넘어 일본(3만7,000달러)과 프랑스(3만8,000달러)를 향해 가는 과정에, 적어도 부정부패가 발목을 잡진 않을 것이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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