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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비겁함이 죄다

입력
2017.01.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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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영원한 제국’ 등 화제작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소설가 이인화, 본명 류철균 이화여대 교수의 긴급체포 소식에 혀를 찰 것이다. 박사학위도 받기 전 이화여대에 부임해 소설가, 평론가, 게임작가 등으로 재능을 과시하던 이. 류 교수는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기말고사를 치지 않았는데도, 조교를 시켜 대신 답안지를 제출케 해 학점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인간과 삶의 본질에 천착하는 것이 문학의 본령이라면 이인화의 비리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게 된다. 아니, 데뷔작 ‘내가 누구인지…’를 이인화라는 필명으로 발표하고 류철균이라는 본명으로 평론하며, 표절 논란에 ‘포스트모더니즘적 혼성모방’이라고 항변했던 그의 전력에 비춰보면 납득할 만한 일일까. 어찌 됐든 그가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체포한 첫 이화여대 교수가 된 것은 최씨의 국정농단에 가담했거나, 소설 ‘인간의 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미화했기 때문은 아니다. 교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업무방해 등)이다.

자기 자리에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은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나, 때로 이 일을 하는 데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국장이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승마협회를 감사한 뒤 ‘양쪽(최씨 측과 반대파)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결과를 보고하는 ‘제 할 일’을 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나쁜 사람”으로 찍혀 끝내 공직에서 쫓겨났다. 자기 역할을 하느라 자리를 걸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그 용기는 잊히기 쉽다.

대통령의 뜻이라며 CJ 측에 이미경 부회장 퇴진을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청와대 근무자들은 다 알겠지만 대통령이 말씀하실 때 그렇게 토를 달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바로 이것이 류철균 교수와 노태강 전 국장이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 출발점이다. 대통령이 아니라도 장관, 회장, 아니 차장, 팀장의 지시에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조 전 수석이나 류 교수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비위를 저지른 게 아니라 그저 조금 비겁했을 뿐이라고 해도, 그 비겁함이 초래할 무질서는 참담하다.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저 무수한 비겁과 직무유기가 빚은 결과를 보자. 안전 감독과 규제 담당자들은 직무유기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렇게 해서 수백 명의 생명이 무고하게 죽었다.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괴물 같은 악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타성과 인습에 젖어 인종학살을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한 채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찰하지 않은 잘못은 죄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새누리당의 핵심 친박 의원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 등에 손을 대고 비선 의료진이 청와대에 들락거린 정황, “늘 (최씨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고 한 전여옥 전 의원 등의 진술을 종합해 보면 박 대통령이 최씨에게 비정상적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측근들이 몰랐을 리 없다. 대통령의 비선실세 의존증을, 추정컨대 일부러 외면한 측근들의 폐해는 이런 것이다.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머리만 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쫓아가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빨리 대처하기 위해 나오셔야 한다, 왜 달려가지 않았습니까? 안보실장, 비서실장 뭘 했습니까? 연민이 있습니까, 죽어가는 국민들에 대한? 아니면 능력이 있습니까? 철학이 있습니까? 뭘 했습니까, 도대체.” (지난해 12월 14일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도종환 의원)

이제 “나는 정말 몰랐다”는 변명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사욕이나 신념 때문이든 비겁함 때문이든, 작정한 무지는 그것만으로 죄가 된다.

김희원 사회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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