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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증류된 순수성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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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증류된 순수성의 이면

입력
2018.05.30 10:5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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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칼럼의 요점은 대중음악으로 세계와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다는 혹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거였다. 이후 좀 더 자세한 각론을 음악 전문지에 쓰기로 계획했으나 이 지면에 계속해서 쓰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 사이에 방탄소년단의 신작 앨범이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정상에 올랐지만 내 논지는 변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방탄소년단을 따라 한국어 ‘떼창’을 하는 것으로 영어의 독점적 지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소비에트를 무너뜨리는데 비틀스가 기여한 것은 별반 없으며, 차일디시 감비노의 ‘디스 이즈 아메리카(This is America)’ 뮤직 비디오 역시 흑인 민권운동을 다시 조직할 수 없다. 이런 태도가 대중문화 혐오로 보일 수도 있지만, 비웃어야 할 것은 대중문화가 아니라 문화를 최종심급으로 삼아온 온갖 ‘신화’다. 우리는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1784)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고, 스토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이 흑인 노예해방 전쟁을, 입센의 ’인형의 집’(1879)이 여성참정권 운동을, 고리키의 ‘어머니’(1907)가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다는 신화를 비웃어야 한다.

‘학자’와 ‘신화 제조기’는 동전의 양면이거나, 백지 한 장 차이로 급과 질이 나뉜다. 어떤 학자는 신화 제조기가 되어 신화를 만들고 `어떤 학자는 신화를 벗긴다. 이를테면 방탄소년단의 쾌거와 그들의 팬덤 아미(ARMY)의 활동은 이동연이 엮은 ‘아이돌 - H.O.T.에서 소녀시대까지, 아이돌 문화 보고서’(이매진,2011)를 일독하면 웬만큼 규명이 가능한, 실체가 벗겨진 신화다. 빌보드 차트를 석권한 것 이외에, K-팝이 진화한 ‘방탄현상’에 새로운 건 없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진화의 선물을 모르쇠 한다.

방탄소년단의 ‘아이 니드 유(I NEED YOU)’ 뮤직비디오에는 뷔가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고 한다. 혹자는 바로 저 장면에 기존 사회 질서의 부정의와 구조적 폭력에 대한 방탄소년단의 비판이 함축되어 있다고 예찬한다. ‘황금가지’를 쓴 J.G. 프레이저는 부친살해 모티프가 인류 역사의 핵심이라고까지 말하는데, 프레이저의 숨은 핵심은 그 아버지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아들이 다시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아버지를 처단했던 혁명가도 예술가도 이런 역설을 비껴가지 못한다. 60년대 반문화의 상징이었던 악동 믹 재거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영국 황실로부터 경(卿ㆍSir) 작위를 받고 희희낙락했던 것을 보라. 문화산업의 바깥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한 말로, 문화산업은 모든 금기와 충격을 다 포용한다.

현재의 방탄소년단은 어느덧 20~25세 사이의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미국 텔레비전 쇼나 인터뷰에서 “여자 친구는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방탄‘청년단’은 “여자 친구는 필요 없다. 우리에겐 팬들이 있다”라고 대답한다. 더 많은 고급차ㆍ여자ㆍ마약을 얻기 위해 팝 스타가 되는 미국에서 때 묻지 않은 이들의 순수성은 문화 충격 자체거나 동양에서 온 영적 구도자들의 계시, 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제 증류된 순수성의 이면을 보자. 한국의 토털 매니지먼트(Total Management)는 아이돌 그룹의 삶 전체를 관리한다. 이들의 계약서에 행여 연애 금지 조항이 있다면, 혁명은 먼저 제 발 밑에서부터 해야 한다.

프랑스 현대철학자를 ‘뽀샵 기계’로 써먹지 않는 방법은 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명과 인용부호(쌍따옴표)를 지우는 것이다. 임시방편이기는 하지만, 자유간접화법은 그들을 문화산업의 사역(使役)으로부터 면제시켜 준다(나부터 실천하자). 지난번 칼럼을 읽은 애독자 가운데 프랑스 현대철학을 오남용하는 자들을 비판한다면서 특정인의 외모를 비하했다고 꼬투리를 잡는 이도 있다. 하지만 칼럼은 김흥국의 외모가 아니라 콧수염을 화제 삼았고, 체 게바라의 턱수염과 비교하기도 했다. 우리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외모를 비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들의 콧수염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머리와 달리, 콧수염의 소유자는 상처받지 않는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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