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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마구잡이 집행… 그들은 부끄러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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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마구잡이 집행… 그들은 부끄러움 몰랐다

입력
2018.04.10 20:5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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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진상조사위 중간 보고

본보 단독 보도 1년6개월 만에

A4용지 60매 분량 원본 공개

블랙리스트 실존 논란에 쐐기

“단순 명단 아닌 실제라는 진술

여러 관계자들로부터 받아”

당시 이의 제기한 직원에게

“정부 반대 예술 하려면 제 돈으로…

영혼 찾으려면 다른 일 하지

왜 공무원 됐느냐” 질책하기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이원재 대변인이 10일 서울 종로구 KT광화문빌딩의 위원회 회의실에서 박근혜 정부가 작성, 운용한 '문화예술인 9,473명 블랙리스트' 원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의 이원재 대변인이 10일 서울 종로구 KT광화문빌딩의 위원회 회의실에서 박근혜 정부가 작성, 운용한 '문화예술인 9,473명 블랙리스트' 원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실물’이 10일 공개됐다.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예술인 9,473명을 망라한 블랙리스트가 국가 사업에 전방위 활용된 사실도 공식 확인됐다. 한국일보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지 1년 6개월 만이다(‘세월호 선언 등 9,473명, 문화계 블랙리스트 확인’∙2016년 10월 12일자 단독 보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산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 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는 이날 서울 종로구 KT광화문빌딩 진상조사위 회의실에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가 2015년, 2016년 ‘한불 수교 130주년 상호 교류의 해’ 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문화예술인을 불법 검열하고 검열에 걸린 이들을 집요하게 지원 배제했으며, ‘9,473명 블랙리스트’가 근거 자료로 사용됐다는 것이 골자다.

블랙리스트는 청와대가 2015년 지시해 문체부가 만들고 각종 문화예술 사업에 활용했다. 세월호 시국 선언,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지 촉구 선언, 문재인∙박원순 지지선언 등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이름이 전부 담겼다. 진상조사위는 문체부 산하 해외홍보원 관계자 A씨가 보관해 온 A4 용지 60쪽 분량의 블랙리스트 원본을 입수해 공개했다. 블랙리스트 실존 논란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진상조사위는 “블랙리스트를 관리한 당시 문체부 예술정책과 오모 사무관에게 리스트를 수시로 받아 썼으며, 리스트가 단순 명단이 아니라 실제 블랙리스트였다는 취지의 진술을 여러 관계자들에게 받았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은 치밀했다. ‘사업 사무국인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문화예술인을 선정해 문체부에 보고 → 문체부가 청와대, 국정원에 검증 요청, 홍보원이 블랙리스트와 대조 → 청와대가 배제 여부 결정 → 홍보원, 예술감독이 프랑스와 협의 비롯한 사후 조치 실행’의 단계로 진행됐다. 한불 교류의 해 사업 실무 기관인 해외홍보문화원(홍보원)은 2015년 문체부에서 받은 블랙리스트 2부를 출력해 사업에 참여하는 문화예술인 명단과 일일이 대조해 ‘문제 인물’을 걸러 냈다.

진상조사위가 공개한 A씨의 진술 취지는 이렇다. “오 사무관이 주는 걸 받아 오라고 해서 받아 봤더니 블랙리스트였다. 상관인 박모 당시 해외문화홍보기획관에게 보고하니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이 민감하게 생각한다. 본부(문체부)에서도 명단을 보고 있으니 잘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문화예술인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정부에 반대하는 예술을 할 거면 자기 돈으로 하라는 건데 뭐가 문제냐. 영혼을 찾으려면 다른 일을 하지 왜 공무원이 됐느냐’고 질책받았다. ‘리스트에 포함된 이가 동명이인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에는 ‘알아서 판단하라’는 답을 들었다. 그런 문제 제기를 한 것이 빌미가 돼 2주 뒤 사업팀에서 밀려났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블랙리스트 실행 가담자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청와대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인 듯했다. 김영하 작가가 원작자인 연극 ‘빛의 제국’은 프랑스와 공동 작업으로 공연될 예정이었다. 청와대는 김 작가가 정부 비판 글을 쓴다는 이유로 공연 취소를 요구했다. 논란 끝에 초연에 김 작가가 참석하지 않는 조건을 달고 가까스로 진행됐다. ‘파리 도서전’에 참석하는 한국 문인은 국내 한국문학 전문가 30여명의 설문조사로 선정하기로 돼 있었다. 문체부는 설문조사로 뽑힌 문인들 중 ‘참석 가능한 사람’을 찍어 내려 보냈다. 이에 김연수, 은희경, 공지영, 김훈, 박민규, 편혜영 작가 등이 파리에 가지 못했다. 프랑스 아르테TV는 ‘한국, 다양한 기적의 나라’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예정이었다. 청와대는 제주 강정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종교인 인터뷰가 실린 것을 문제삼았다. 인터뷰 삭제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자막 지원비 2,000여만원을 지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복했다. ‘프랑스 내 한국의 해’ 폐막식 장소는 원래 파리 퐁피두센터였다. 청와대는 양혜규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인 곳이라며 반대했다. 장소를 바꾸느라 예산 2,200만원을 더 썼다. 영화감독과 연출가 ‘김종석’을 헷갈려 엉뚱한 사람이 지원 배제를 당하기도 했다. 블랙리스트가 마구잡이로 집행됐다는 뜻이다.

이원재 진상조사위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중대 국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진상조사위는 이달 말까지 조사를 마무리하고 다음달 최종 조사 결과와 제도개선안을 발표한다. 블랙리스트 작성∙시행에 가담한 인사들의 처벌∙징계 권고를 비롯한 후속 조치도 함께 내놓는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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