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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그게 세상의 끝은 아니기에

입력
2017.12.29 11:4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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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는 성공이 없듯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실패 또한 없다.”

매년 12월 전공과목 마지막 수업에서 제자들에게 전하는 금언이다. 살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를 녹여냈다. 수강생 대다수가 졸업을 앞둔 터라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담았다.

흔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굴곡 없는 삶도 거의 없다. 커다란 성취가 참담한 실패를 잉태하는가 하면, 처절한 실패가 엄청난 성공의 토대가 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리라. 일이 잘 됐다고 환호작약만 해선 안 되고 일이 꼬였다고 마냥 비탄에 젖어 있을 필요가 없는 연유다.

어떤 성공이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그걸 일구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포기한 게 별로 없더라도 성공은 초심을 잃게 하거나 방심을 부르기 쉽다. 변화에 게으른 채 구태의연한 방식을 답습하게도 한다. 그래서 성공의 저주(curse of success)가 종종 운위되는 것이다.

실패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고 성공을 위한 전기를 제공한다는 사실은 성장 경험을 통해 몸소 절감했다. 학창시절의 난 장차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리라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특히 고등학교 때까지 난 의지가 너무 박약했고 끈기 또한 부족했다. 기껏해야 남들보다 기억력만 조금 더 나았을 뿐이다.

더욱이 난 열 살 때까진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이런 성장 경험이 부모와 합친 뒤 날 무척 힘들게 했다. 부모와 애착관계가 거의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간단없이 갈등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내가 청소년기 내내 쇼펜하우어에서 헤어나질 못했던 것도 내 성장 경험과 맞닿아 있다.

곡절 많았던 성장 과정이 고등학교 시절에 제대로 사달을 냈다. 입시가 코앞인 3학년 2학기에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무단결석을 밥 먹듯 하는 지경에까지 갔다. 돌이켜보면 평소 부모와 소통이 거의 없었던 게 내가 상상을 초월하게 무너져 내리는 데 일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방황과 일탈은 자식을 모범생으로 알고 있던 부모에게 깊은 실망과 불신을 안겼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평소 어울리던 친구들이 죄다 짐을 싸서 낙향한 뒤에야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대학엔 가야 할 것 같아 벼락치기로 얼떨결에 대학에 진학했다. 요즘처럼 서울 소재 대학 가는 게 어렵다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절박함이 초인적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대학에 와선 지난날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몸이 많이 아팠다. 입학할 때 68kg이던 체중이 4년 뒤 졸업할 무렵엔 54kg이 됐다. 그래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뒤엔 이런저런 갈등 없이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때 고등학교 시절의 방황과 일탈이 대학에서 학업에 매진하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부모님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방편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 경비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두문불출한 채 유학 준비에 모든 걸 쏟았다. 인간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마늘과 쑥만으로 100일을 버텨낸 곰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10개월을 지냈다. 스스로를 대견해할 정도였는데 쓰라린 실패의 기억이 마음을 다잡고 분발하게 했다.

누구나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무척 힘들고 난감한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상황이 잘 수습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쉽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그게 세상의 끝은 아니다. 처절한 실패는 사람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나에게 닥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당장은 알기 어렵다. 세월이 많이 흘러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새해에는 매사에 일희일비 하지 말고 좀 더 느긋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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