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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니까 아프다... 탐미로 펼쳐낸 '막장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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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니까 아프다... 탐미로 펼쳐낸 '막장 연애'

입력
2017.02.1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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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뿐인 사랑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ㆍ양윤옥 옮김

아르테 발행ㆍ448쪽ㆍ1만5,000원

히라노 게이치로는 자신의 작품에 일련번호를 붙여 각 단계별로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왔다. 신작은 ‘분인주의(分人主義·상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인간 면모)’를 바탕으로 한 3기 문학으로 사랑에 관한 생각을 담았다. 다키모토 미키야 제공
히라노 게이치로는 자신의 작품에 일련번호를 붙여 각 단계별로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해왔다. 신작은 ‘분인주의(分人主義·상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인간 면모)’를 바탕으로 한 3기 문학으로 사랑에 관한 생각을 담았다. 다키모토 미키야 제공

“당신에게 사랑이란 뭐야?”

이혼 직전 아내의 마지막 질문에 “물이나 공기처럼 없으면 죽을 정도는 아닌 것”이라고 쐐기를 박아 버린 37살의 산업 디자이너 아이라 이쿠야는 ‘돌싱’이 돼 일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낸다. 의뢰 받은 각종 디자인에 대한 생각과 전처의 저 질문을 진동추처럼 반복하던 어느 비 오는 밤, 사무실로 헤어진 지 20년 지난 어머니 유골이 배달된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 도로의 폭발음까지 들은 아이라는 자석에 끌린 듯 사무실을 뛰쳐나와 교통사고 현장으로 간다.

얇은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사고 차량에 다리가 깔려 신음하고, 함께 차를 탔던 40대 중반의 남자는 아이라를 보자마자 10만엔을 찔러준 채 사라진다. 응급실에 데려간 여자의 정체는 유부남과의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마성의 여배우 가나세 구미코. 함께 있던 남자는 이벤트 기획사 사장 마카사 류지로 불륜 관계가 알려질까 두려워 아이라를 보자마자 도망친 거였다. ‘각선미의 여왕’이란 의미의 가명을 쓰는 여배우는 이제 왼쪽 허벅지 아랫부분을 절단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해진다.

새 병원 인테리어를 아이라에게 맡긴 의사 하라다 시즈카는 온갖 욕을 먹어 가면서도 병원 홍보를 위해 가나세를 새 재활치료과로 데려오고 내친김에 아이라에게 의족 디자인까지 의뢰한다. 상처로 똘똘 뭉친 아이라와 가나세는 서로를 보듬으며 새 삶을 찾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간추리면 막장 드라마 시놉시스쯤으로 분류될, 이 통속소설의 저자는 놀랍게도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다. 1999년 23세에 ‘일식’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인간 내면 문제를 탐미적 문체로 담아 ‘미시마 유키오의 재림’이라는 극찬을 받아 왔다. 주로 이야기해 온 죽음, 인간 본성, 내면의 문제와 대비되는 몸, 육체, 타인과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 작가의 첫 연애소설이다.

심지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소설의 진가는 당연히 인물 심리와 정경 묘사를 ‘언어 예술’로 조탁한 행간에 담긴다. 이를테면 아이라로부터 10만엔을 돌려받은 마카사가 분을 못 이기고 가나세가 유부남과 사귀는 건 자신이 처음이 아니며 “그 여자의 음란은 완전히 병”이라고 떠들어댈 때, 아이라가 여러 남자들과 관계하며 사람들 입에 ‘음란하다’고 오르내렸던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모욕을 떠올리고 끝내 가나세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되는 그런 장면에서다.

젖가슴처럼 말랑한 가나세의 단단(斷端·다리 절단 부분)을 만지며 수많은 남자들을 유혹하게 만든 어머니의 하얀 젖가슴을 떠올리는 장면, 가나세가 다리가 없어진 자리에서 느끼는 환통(幻痛)에 빗대 사랑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로 꼽을 만하다.

‘구미(구미코)’의 왼쪽 다리 단단을 마주했을 때도 저절로 그것을 떠올렸지만, 지금 먼 기억 너머로 보이는 어머니의 하얀 젖가슴은 그 반대의 연상에 따라 아프게 상처 입은 단단처럼 보였다. 그 끝에 상실된 아버지와의 사랑의 환통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라는 여태까지 모르는 척 외면해 온 자신의 환통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는 역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 뚝 잘려 나간 관계의 단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금껏 알지 못했었다. 쇼지 의사의 말대로 그 환통은 분명 ‘문득 깨닫고 보니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어떤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유골이 도착하고 구미의 사고를 조우했던 그날부터 아마도 다시 한번 그것은 기억의 어둠 속 밑바닥에서 통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막장 줄거리와 19금 정사, 정제한 언어의 향연이 엮인 작품은 여러 계층의 독자를 잡을 만하다. 작가는 “살아 있는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의 육체라는 주제 대해 관심이 되돌아왔다. 소중한 것이 없어졌을 때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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