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승준 기자

등록 : 2017.09.12 04:40

김제동 '환상의 짝꿍' 국정원 언급 후 돌연 폐지

김미화 문성근 방송 퇴출 배후도 국정원 가능성 농후

등록 : 2017.09.12 04:40

영화계 한 중견 제작자는 2009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정보기관 요원으로 여겨지는 한 남자가 사무실을 다짜고짜 찾아와 명령조로 이야기를 했다.

연평해전에 대한 영화를 국가에서 만드니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영화감독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으라는 압박이었다. 해당 제작자는 단호히 거절했으나 이후 보복이 두려워 이런 사실을 주변에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충무로에선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영화계를 사찰하고, 정부 비판적 영화 제작을 방해한다는 풍문이 만연했다. 11일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발표한 ‘박원순 서울시장 관련 문건’ 및 ‘MB정부 시기의 문화ㆍ연예계 정부 비판세력 퇴출 건’ 관련 조사결과는 충무로를 떠돌던 국정원 관련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원은 문화 여러 분야 중 영화와 방송 등 연예계를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정부 비판적인 좌파 성향 연예인을 퇴출하기 위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벌였다.

국가정보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정원 개혁위 조사결과를 보면 당시 국정원 활동 계획과 보고가 담겨있는데, 현실에서도 그대로 실행된 정황이 농후한 사례가 많다. 국정원은 2011년 4월 MBC의 한 라디오 진행자 퇴출을 위해 물밑작업을 했다. 같은 달 김미화는 결국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DJ에서 물러났다. 2003년부터 8년 여 동안 높은 청취율을 기록한 프로그램을 이끈 진행자의 갑작스러운 하차를 둘러싼 외압 의혹이 이제야 풀린 것이다. 김미화 하차를 둘러싼 외압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011년 MBC노동조합이 발행한 비상대책위원회 특보에 따르면 김재철 MBC 전 사장은 여의도 MBC 방송센터 7층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김미화에게 “라디오가 시끄럽던데, 김미화씨,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겨보세요”라고 말했다. 김미화는 즉답을 피했지만 김 전 사장이 1층 복도까지 쫓아가 프로그램을 옮길 것을 권유했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었다.

아예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정원은 2010년 4월 MBC에 ‘환상의 짝꿍’ 폐지를 지시했다.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오른 방송인 김제동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3년 동안 방송됐던 ‘환상의 짝꿍’은 그 해 7월 돌연 문을 닫았다.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오른 연예인들은 연예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다. 배우 문성근은 2009년 ‘자명고’ 이후 2016년까지 드라마에 출연하지 못했다. 당시 문성근은 사석에서 “무서워서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문성근은 지난 7월 드라마 ‘조작’에 출연하며 무려 8년 만에 안방에 모습을 비췄다. 문성근은 그간 정지영, 장준환 등 사회 비판적인 영화감독의 작품에만 출연할 수 있었다. 문성근 지난달 ‘조작’ 제작발표회에서 “나는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었지만 못한 것”이라며 외압설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그 재능에 걸맞은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게 중요한 일인데 다른 이유 때문에 일을 못하게 하는 건 일종의 폭력”이라는 한탄도 했다.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가수 김장훈의 연예 활동도 순탄치 않았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등 비롯해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까지 참여해 온 김장훈은 2015년 부당한 외압에 시달렸다며 “최근 1년간 방송 출연 제약, 세무조사, 프로포폴 투약 조사 등 이상하고 석연치 않은 일들을 겪었다”고 폭로했다. 이창동을 비롯해 박찬욱, 봉준호 감독 등 한국 영화를 이끈 유명 감독들도 이름이 올랐는데, 공교롭게 세 사람 모두 7년 여의 국내 공백기를 가졌다. 이 감독은 2010년 ‘시’ 이후 올해까지 단 한 편의 영화도 내놓지 못했다. 박 감독은 2009년 ‘박쥐’ 이후 2016년 ‘아가씨’를 내놓기까지 7년 동안 국내 영화를 찍지 않았고, 봉 감독도 2009년 ‘마더’ 이후 국내에서 단 한편도 연출하지 않았다.

국정원은 영화 ㆍ방송가를 꾸준히 관리해왔다. 여러 방송 관계자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은 방송 관계자들을 만나 프로그램 제작 동향을 파악했다. 방송 관련 단체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명박 정권 초기부터 박근혜 정권 초기까지 1년에 몇 번 꼴로 국정원 직원이 찾아왔다”며 “요즘 방송 프로그램 동향과 ‘이 프로그램 어떠냐’ 등의 의견을 물어봤다”고 말했다. 방송의 대중적인 파급력이 워낙 커 프로그램 제작 동향 및 제작자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유독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국정인 블랙리스트에 오른 82명의 문화ㆍ예술인 중 일부 실명이 공개되자 당사자와 업계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블랙리스트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정부 기관이 특정 문화ㆍ예술인 지원을 배제하고 활동에 제약을 주기 위해 움직인 실체가 확인돼서다.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한 방송인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놀랐다.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고 신해철의 최측근 이모씨는 “(블랙리스트에)이름이 올라 있는 걸 확인하니 안타깝고 씁쓸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해철은 이명박 정부의 미국 쇠고기 전면 개방 등에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었다.

정부의 정치적 성향에 따른 문화 탄압 사례를 더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문성근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국뽕영화’는 MB(이명박 전 대통령)때도 여러 정황이 있으니 수사에 포함시키라”고 촉구했다. 박 전 대통령 정부 시기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영화 제작을 위해 국정원 직원들이 영화 제작 및 투자 관계자들을 만났다는 한 매체의 보도에 대한 반응이었다. 록밴드 시나위 기타리스트인 신대철은 “이번 국정원 블랙리스트는 50년 전으로 퇴보한 정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한탄하며 “이번 기회에 정부의 (문화예술계에 대한)부당한 영향력 행사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은영ㆍ양승준ㆍ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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