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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달군 ‘버닝’… 이창동 감독 “미래 없는 청춘의 분노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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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달군 ‘버닝’… 이창동 감독 “미래 없는 청춘의 분노 담아”

입력
2018.05.17 21:59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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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 8년 만의 복귀작

한국 사회의 계급주의 감각화

“완벽한 연출” “걸작 그 자체”

세계 영화계 유명인사들 호평

황금종려상 첫 수상 가능성 높여

영화 ‘버닝’으로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창동 감독(왼쪽부터)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가 17일 포토콜 행사를 가졌다. 칸=EPA 연합뉴스
영화 ‘버닝’으로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창동 감독(왼쪽부터)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가 17일 포토콜 행사를 가졌다. 칸=EPA 연합뉴스

“요즘 시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분노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 ‘버닝’에서 이창동 감독이 새롭게 꺼내든 화두는 ‘분노’다. 17일(현지시간) 칸영화제 공간 팔래 드 페스티벌에서 열린 경쟁부문 기자회견에서 이 감독은 “세상은 점점 세련돼지고 편리해지는데 젊은이들은 미래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며 “그들에게는 이 세계가 거대한 미스터리로 보일 거라 생각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이 감독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영상 미학으로 창조됐다. 카메라는 찢어지고 부서진 비닐하우스처럼 세상에 존재감 없이 내던져진 청춘의 분노를 비추며 한국 사회의 계급주의를 형상화한다.

소설가를 꿈꾸지만 어떤 소설을 써야 할지 알지 못하는 종수(유아인)는 택배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친구 해미(전종서)는 종수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한다. “재미만 있으면 나는 뭐든지 한다”고 말하는 벤은 자신의 호화로운 세계에 종수와 해미를 초대하고, 자유롭고 도발적인 해미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자의 춤을 추며 종수와 벤을 잇는다.

세 사람의 만남은 소똥 냄새가 풍겨오는 낡은 시골집 마당에서 마시는 고급 와인처럼 어딘가 부조리하다. 타는 듯한 노을이 이들을 감싸면 묘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어릴 적 집을 나간 엄마의 옷을 태워버린 기억을 갖고 있는 종수에게 벤이 말한다. “나는 가끔씩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갖고 있다”고, “쓸모 없는 비닐하우스들이 내가 태워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벤의 고백 이후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불태워진 비닐하우스를 찾아 헤맨다.

무기력한 얼굴에 분노를 감춘 종수는 청춘의 초상인 동시에 부조리한 세상에 억눌린 자아를 대변한다. 벤은 도통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인 세상 그 자체다. 그래서 둘의 대립은 필연이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그들의 관계가 숨막히는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그 서스펜스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전복이냐 패배냐의 갈림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혁명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결말이다. 이 감독은 “영화 안에 사회적ㆍ경제적 코드를 숨겨 놓았지만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영화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며 “관객들이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듯 받아들이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버닝’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제공

‘버닝’은 전날 밤 뤼미에르 극장에서 열린 공식 상영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존경과 예우가 실린 묵직한 갈채가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채 풀려나지 못한 긴장감에 숨이 막혀 환호성을 지를 수조차 없었던 시간이 5분간 계속됐다. 공식 상영이 끝나면 기립박수를 보내는 게 관례이지만 ‘버닝’은 예외다. 올해 경쟁부문 초청작들이 기대 이하라는 평가를 받은 데 비춰볼 때 ‘버닝’에 쏟아진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객석을 마주한 주연배우 유아인과 스티븐 연은 감정에 북받친 듯 눈시울을 적셨다. 2010년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시’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이 감독은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 제작자인 이준동 파인하우스필름 대표는 가슴에 단 배지를 방송카메라에 보여줬다. 이 감독은 물론 임권택, 박찬욱, 홍상수 등 한국 영화감독들을 세계에 알린 칸영화제 자문위원 피에르 르시앙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르시앙은 칸영화제 개막을 사흘 앞둔 지난 5일 별세했다.

16일(현지시간)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버닝’의 공식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이 이창동 감독과 주연배우들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칸=김표향 기자
16일(현지시간)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버닝’의 공식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이 이창동 감독과 주연배우들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 칸=김표향 기자

앞서 ‘밀양’(2007)과 ‘시’에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구원에 대해 질문했던 이 감독은 ‘버닝’에서 새로운 주제의식을 꺼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았지만, 문법이 달라졌고 영화 안에 품어낸 세계가 깊어졌다. 다만 모든 프레임과 대사가 메타포이다 보니, 메시지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현지에선 “러닝타임 148분이 너무 길었고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반응도 나왔다.

하지만 세계 영화인들의 온도는 조금 더 뜨거웠다.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순수한 미장센으로서 영화의 역할을 다하며 관객의 지적 능력을 기대하는 시적이고 미스터리한 영화”라고 평했고, 프랑스 배급사 디아파나의 미쉘 생-장 대표는 “미장센과 연기가 환상적이었다”며 “그야말로 걸작 그 자체”라고 감탄했다. 지오바나 풀비 토론토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도 “모든 프레임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연출된 듯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계속 더 있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이창동 감독이 이렇게 엄청난 영화로 돌아온 것이 너무 기쁘다”며 거장의 귀환을 반겼다. 세계 영화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유명 인사들의 호평이 쏟아지면서 ‘버닝’은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의 한국영화 첫 수상 가능성을 한층 밝혔다. 폐막식은 19일이다.

칸=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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