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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중간 가기도 어려운 세상

입력
2017.02.2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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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두드러지면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다. 나서지 않고 중간 정도에 묻어가는 것이 맘 편히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하다. 중간쯤 서 있으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생긴다. 경제적으로도 중산층이 되면 큰 걱정은 없다. 어떤 글에서 선진국과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을 비교한 것을 보며 생각에 잠긴 적이 있다. 중산층은 상류층과 하층의 중간이다. OECD 기준으로는 소득 순으로 나열했을 때 가운데 집단이고 소득 중간값의 50~150% 계층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득 기준이다. 프랑스나 영국 등 문화선진국은 좀 다른 기준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을 중심으로 제시했던 중산층 기준은 놀랍다. 외국어를 구사하고, 즐기는 스포츠와 다루는 악기가 있고, 남과 다른 맛을 내는 요리가 있고, '공분'에 참여하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한다는 것 등이다. 영국의 중산층 기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페어플레이를 하고, 자기주장과 신념을 갖고 있고, 강자에 대응해 약자를 두둔하고, 불의에 의연히 대처하는 것 등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완전히 경제적 기준이다. 융자 없는 아파트, 중형차에 월급 500만 원, 예금 잔고 1억원 이상 등 재산과 물질적 가치로만 따진다. SNS에 떠도는 ‘수저론’은 더 가관이다. 금수저는 자산 20억원, 연수입 2억원 이상 가구, 그 위로는 아다만티움 수저, 다이아 수저가 있다. 최하층인 흙수저는 자산 5,000만원, 연수입 2,000만원 미만이다. 자산 5억원, 연수입 5,500만원을 넘어야 하는 동수저는 돼야 그나마 중산층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입사원서를 내는 족족 탈락하는 이른바 전탈자들이 속출하는 마당에 동수저 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재산 기준으로 노비부터 황제까지 분류한 ‘대한민국 계급표’라는 것도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재산 5,000만원 미만은 노비, 5,000만~10억원도 평민에 불과하다. 평생 월급을 모아도 넘을 수 없는 벽은 상위 1%에 해당하는 30억원 이상 왕족부터다. 1,000억원 이상이 돼야 최고층인 황제로 분류된다. 지금이 봉건 왕정시대도 아닐진대, 21세기 한국은 수저론이라는 봉건질서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 천민자본주의, 헬조선 같은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다. 가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들 하는데 이제는 중간 가기도 힘든 세상이다. 가만 있으면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한국에서 중산층으로 사는 건 참 힘든 일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대사회의 자본은 경제자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봤다. 사람과의 관계로 만들어지는 사회자본, 취향이나 소장품 등의 문화자본, 지위나 사회 활동에서 비롯되는 상징자본도 경제자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르디외 학파에서는 20개 항목의 신중산층 판별 체크리스트를 제시하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항목도 포함돼 있다. 친척 중 외국인이 있는가, 20명 이상 파티를 주최한 적이 있는가, 유니세프 등 국제단체에 기부하고 있는가, 신문·방송에서 인터뷰 한 일이 있는가, 외국어를 2개 이상 구사하는가 등이다. 경제 항목보다는 사회문화 항목이 많다.

이참에 우리도 중산층 기준을 한번 바꿔보자. 사회문화 관점에서 중산층을 판별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소득 분위나 재산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감, 소통과 공감 능력, 고상한 취미, 삶에 대한 자세, 행복에 대한 생각 등의 기준 말이다. 질문과 기준이 달라지면 답도 달라진다. 책임감을 갖고 사회에 참여하는가, 삶을 즐기고 있는가,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인가, 타인과 잘 소통하는가 등. 기준을 바꿔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름답고 즐거운 일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선진국을 물질로만 따라잡으려 하지 말고 이제는 가치나 문화를 가꾸는 데 힘써야 한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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