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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등록 : 2015.12.24 14:47
수정 : 2015.12.24 21:28

[김월회 칼럼] 사람, ‘하늘의 빛’이 깃든 존재

등록 : 2015.12.24 14:47
수정 : 2015.12.24 21:28

성탄절 아침이다. 기독교의 메시아가 나신 날이다. 메시아 하면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빛이고 다른 하나는 소금이다.

아마도 제자들더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하신 예수의 말씀 때문인 듯싶다.

이 말씀을 처음 접했던 때였다. 예수는, 불의를 행하는 자라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호되게 꾸짖으셨다. 하여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쉽게 이해됐다. 그렇다고 빛이 되란 말씀이 어려웠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신앙의 모범이 되라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했거니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을까?

유가의 경전인 ‘대학’의 서두에는 “명명덕(明明德)”이란 구절이 나온다. “밝은 덕을 밝힌다”는 뜻으로, 대학 그러니까 큰 학문을 하는 목표의 하나로 제시된 것이다. 여기서 ‘밝은 덕’은 이를테면 공자 같은 성인군자의 훌륭한 덕성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도 포함되어 있는,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다 지니게 되는 하늘의 본성을 가리킨다. 맹자는 이를 두고 선하다고 규정한 바 있다. 곧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타고난 하늘의 선함을 유가들은 밝은 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비유였을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밝은 존재라는 규정 말이다.

그러고 보니 유가뿐만이 아니다. 노자나 장자로 대변되는 도가도 사람과 빛을 즐겨 연결 짓곤 했다. 화광동진(和光同塵)과 같은 표현이 대표적 예이다. ‘노자’에서 비롯된 이 구절의 원문은 “화기광동기진(和其光同其塵)”이다. 자신의 빛을 온화하게 하여 세속과 함께 한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사람을 빛을 품은 존재로 규정한 노자의 시선이 깔려 있다. 사람은 빛을 발하지만 모름지기 현란해서는 안 된다는 권계도, 기본적으로 그가 사람을 빛을 품은 존재로 보았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다.

장자는 이러한 빛을 ‘하늘의 빛’ 곧 천광(天光)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음이 태연하고 안정되어 있으면 하늘의 빛을 발하게 된다고 하였다. 뒤집어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늘의 빛을 품고 있지만, 마음이 시달리다 보니 자기 속 하늘의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무엇에 그다지도 시달리는 것일까. 장자는 하늘의 빛을 발하는 자에게는 사람들이 깃들고 하늘도 그를 돕는다고 했다. 이런 이를 가리켜 그는 ‘하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힌트가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피하게 만들고 하늘도 자신을 외면하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이 바로 마음을 시달리게 하는 바들이다. 갖은 탐욕과 패악 같은 것들 말이다.

하늘의 빛을 품은 하늘의 사람임에도 이를 온전히 누리기는커녕 자기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역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스스로 광원이 될 수 있음에도 기꺼이 어둠에 익숙해지려는 모순. 노자나 장자가 문제 삼은 바가 이 점이었다. 하여 노자는 빛을 따르는 삶을 강조했다. 자신에게 내장된 빛에 의지하여 참된 빛의 경지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였다. 내면에 깃든 밝은 덕을 밝히라는 ‘대학’의 요구도 그렇듯이, 이들은 결국 사람이 빛을 품을 존재임을 한 목소리로 일깨웠던 것이다.

또한 이는 나 바깥의 빛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나의 빛을 밝힐 수 없음을 말해준다. 예수가 세상의 어둠을 거둬내려 오셨다 함은, 단지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쏘여 주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 빛으로 인해 우리가 빛나게 된다 함도, 우리가 그 빛을 수동적으로 반사함만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사람은 그저 거울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비유컨대 사람은 촛불이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다. 예수가 세상을 밝힌다 하심은 이러한 ‘사람 촛불’ ‘사람 횃불’에 불이 밝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빛이 내 안팎에서 호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참되게 밝아진다. 저마다 자신의 빛을 발하고, 그 빛이 진리의 빛과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의 사람’이 된다. 화사한 봄날, 모를 내기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아 볍씨를 담가 놓으면 볍씨 바깥의 물이 안으로 스며들어 싹을 움틔우기 시작한다. 볍씨는 그렇게 생명으로 충일해진다. 이때 볍씨 안에 들어와 생명 불을 켠 물은 볍씨 바깥의 물과 동일하다. 물은 그렇게 볍씨 바깥에 따로 존재하지도, 또 그 안에만 고립되어 존재하지도 않는다.

예수가 진리의 빛으로 오셨을 때 그 빛도 마찬가지다. 애써서 남을 비추는 촛불이 되자는 말이 아니다. 횃불처럼 타오르며 세상을 환히 비추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안에 깃든 하늘의 빛을 묵묵히 밝히며 존재하자는 것이다. 내가 작더라도 그렇게 빛나고 있다면 언젠가 나의 불을 보는 이는 자기의 불 밝힘을 외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빛이 하나둘씩 늘면, 자기 불꽃에 불 밝히지 못하는 이들도 그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도 자기에 깃든 하늘의 불을 밝히게 된다면 세상은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할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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