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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케네디, 마리화나 합법화와 인권의 투사

입력
2016.02.1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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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마이클 J. 케네디는 마리화나 전문 잡지 'High Times'의 고문 변호사이자 발행인겸 경영인이었고 '인기 없는' 피의자들의 변호사였다. 그는 권력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하이 타임스 홈페이지.
마이클 J. 케네디는 마리화나 전문 잡지 'High Times'의 고문 변호사이자 발행인겸 경영인이었고 '인기 없는' 피의자들의 변호사였다. 그는 권력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하이 타임스 홈페이지.

60,70년대 미국 히피 전설의 주역들 가운데 토머스 K. 포케이드(Thomas King Forcade, 1945~1978)라는 이가 있다. 그는 67년 유타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해 비행기술을 익히자마자 1년도 안 돼 불명예 전역, 혼자 경비행기를 몰고 멕시코 콜롬비아 자메이카 등지를 다니며 값싸고 질 좋은 마리화나를 구해 플로리다와 조지아 앨러배마 등지로 공급한,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해외직구ㆍ직배송 채널을 개척한 인물이다. 그가 숨지기 직전까지, 마약조직의 견제와 마약국의 단속을 피해가며 그 일을 한 까닭은, 돈이 아니라 ‘히피코뮨’의 복지(!)를 위해서였다.

물론 돈도 벌었다. 그 돈으로 그는 지금도 건재한 마리화나 전문 월간지 ‘하이 타임스(High Times)를 1974년 창간했다. 잡지는 “숙모의 반짇고리에서부터 대학 기숙사 서랍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환경에서” 마리화나를 재배하는 방법서부터- 종이 타월과 약간의 물만 있으면 나머지는 자연이 알아서 해준다는 게 잡지의 주장이었다- 잎의 건조ㆍ가공ㆍ사용법, 산지별 품질과 가격 동향, 효능 등 학술 정보, 법률 상식, 에세이까지 그야말로 실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정보를 수록했다. 필진은 물론 대부분 가명이었지만 훗날 알려진 바 찰스 부코스키, 윌리엄 브로우즈, 앨런 긴즈버그, 트루먼 카포티, 앤디 워홀 등도 열혈 독자이자 필자였다고 한다.

마리화나 소지죄만으로도 운 나쁘면 10년 넘게 징역을 살던 시절이었다. 포케이드와 하이 타임스 편집진의 방패는 오직 하나 ‘수정헌법 1조(종교ㆍ출판의 자유)’였다. 하지만 진짜 믿은 건, 그들의 변호사이자 또 한 명의 히피 영웅 마이클 존 케네디(Michael John Kennedy)였다. 미국 23개 주가 의료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하고 4개 주가 오락용 마리화나를 허용한 2016년 오늘까지 그 긴 세월 동안 케네디는, 합법과 불법의 보이지도 않는 경계를 외줄 타듯 걸어온 잡지의 든든한 방어막이었고, 포케이드 사후 하이타임스의 발행인 겸 경영인이었다. 그가 1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하이 타임스는 창간 첫 해부터 파란을 일으켰다. ‘플레이보이’를 패러디해 센터폴드(잡지 중앙의 펼쳐지는 면)에 수영복 차림의 여성 모델 대신 그들이 꼽은 최고의 마리화나 사진을 편집한 잡지는 50만 부 넘게 팔렸고, 광고 의뢰도 줄을 이었다. 하이 타임스는 제작ㆍ소비 자체가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한 ‘운동(movement)’이었다. 그들은 마리화나에 대한 오해와 곡해에 맞서 ‘체험적ㆍ과학적 진실’을 공격적으로 홍보했다. 정치 성(sex) 음악 영화 등 그 취지에 부합하는 내용이면 가리지 않고 소개했다. 하지만 잡지의 보다 실질적인 목적, 설립자 포케이드의 의도는, 마리화나 재배법을 전국ㆍ전세계에 알려 공권력의 금지 자체를 무력화하자는 거였다. 그는 친구이자 고문변호사 케네디에게 저 얘기를 하며 “당신도 내가 왜 하이 타임스를 창간했는지 알지 않느냐?(…) 정부는 아마 생산 자체를 통제할 수 없게 될 거다. 그러면 그 수요를 공권력이 어떻게 통제하겠는가”라고 말했다.(High Times, 2015.3.6)

1978년 11월, 32세의 포케이드는 잡지에 대한 지분 일체를 잡지 구성원과 ‘노멀(NORMLㆍ1970년 출범한 마리화나 법개정을 위한 전국기구)’에 넘기고 돌연 자살했다. 마약단속국(DEA)의 압수 수색을 피하기 위해 대량의 마리화나를 폐기한 뒤 빚에 쫓겨 자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하이 타임스 편집진과 그의 친구들은, 지금은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꼭대기 층- 포케이드를 보내는 가장 ‘하이(High)한 공간이 거기였다- 을 임대해 장례식과는 별도로 그들만의 추모의식을 가졌고, 거기서 포케이드의 골분(骨粉)을 마리화나에 섞어 함께 피웠다고 한다. 설립자의 정신을 뼈와 영혼에 간직하겠다는, 골수 히피들의 결속의식이었을 것이다. 행사 직후 포케이드 재단이 설립됐고, 케네디는 재단이사장 겸 잡지 발행인이 됐다.

케네디에게 하이 타임스는 전략적 베이스캠프였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법적 정의였고, 마리화나는 부당한 권력에 짓밟힌 인권과 정의의 풀잎이었다.

케네디는 미국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애쓴 소송변호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법적 정의였고, 마리화나는 부당한 권력에 짓밟힌 인권과 정의의 풀잎이었다.
케네디는 미국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애쓴 소송변호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개인의 자유와 법적 정의였고, 마리화나는 부당한 권력에 짓밟힌 인권과 정의의 풀잎이었다.

그는 1937년 3월 23일 워싱턴 주 스포캔 시에서 태어났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거쳐 해스팅스 로스쿨을 졸업했고, 육군에 입대했다. 제대하자마자 그는 전미긴급시민자유위원회(NECLC) 소속 변호사가 된다. NECLC는 미국자유인권협회(ACLU)의 활동이 미온적이고 제한적이라며 못마땅해 하던 이들이 1951년 설립한 인권단체로 ACLU가 법률조언에 그친 사안에 대해서도 기소단계에서부터 법률 대리인으로 개입하곤 했다. 케네디는 60년대 캘리포니아 지주들의 과도한 토지 임대료에 맞서 농장 이민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한 멕시코 이민자 출신 운동가 세자르 차베스(Cesar Chavez,1927~1993)와 그의 전국농민노동자협회(NFWA)의 소송을 대리했고, 66년 LA 선셋대로 히피 폭동 진압 과정에서 몸수색을 빙자해 여성 참가자들을 성추행한 경찰에 몸으로 맞서다 연행되기도 했다. 68년 4월 마틴 루터 킹의 암살로 촉발된 시카고 폭동 직후, 선동자로 몰린 레니 데이비스(Rennie Davis) 등 이른바‘시카고 세븐’에 대한 하원 비미활동위원회 재판정에서 “미국 헌법이 지금 의회의 무장집단(armed campㆍ극우 진영을 지칭)에 의해 강간당하고 있다”고 발언, 모독죄로 구금되기도 했다.

그의 고객 중에는 ‘LSD의 성자’라 불리는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 1920~1996)와 그의 히피공동체 ‘영원한 사랑 형제회(Brotherhood of Eternal Love)’ 간부들도 있었다. 73년 마약단속국(DEA)이 케네디의 라구나비치 집을 급습, 함께 있던 형제회 간부 마이클 랜덜(Michael Randallㆍ화학자)과 함께 그를 연행했다. 케네디의 혐의는 여성과 아이들 앞에서 외설적인 말(혹은 행위)을 했다는 거였다. 물론 그는 금세 풀려났다. 77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거기 있었던 여성은 내 아내와 랜덜의 부인뿐이었고, 내가 아는 한 애들이라면 마약단속반원들 뿐이었다”고 말했다.(하이타임스, 2016.1.25)

하이 타임스를 창간한 히피의 전설 토머스 포케이드. 생전의 그가 싸움을 벌이면 케네디는 지켰고, 그의 사후 케네디는 싸움과 방어를 동시에 해냈다. 그리고 사실상 승리했다.
하이 타임스를 창간한 히피의 전설 토머스 포케이드. 생전의 그가 싸움을 벌이면 케네디는 지켰고, 그의 사후 케네디는 싸움과 방어를 동시에 해냈다. 그리고 사실상 승리했다.

포케이드와 케네디가 처음 만난 게 그 무렵인 73년이었다. 케네디는 포케이드가 커다란 돈가방을 던져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변호 좀 해줘요. 대배심이 초대장을 보냈어요. 마약 밀수 모의 혐의라나. 모의라니 젠장. ‘모의’할 시간이 어딨어? 밀수하기 바쁜데! 돈에는 관심 없어요. 그건(돈가방) 당신 겁니다.”(하이타임스, 2015.3.06) 둘은 금세 친구가 됐다.

포케이드가 숨진 뒤 짐을 떠안은 케네디는 하이 타임스 법적ㆍ경제적 살림을 함께 챙겨야 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80년대는 낸시 레이건의 마약과의 전쟁 ‘Just Say No’캠페인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마약 단속은 격해졌고, 반문화 운동의 열기는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져 갔다. 하이 타임스의 제1 생존 원칙은 역설적이게도 ‘준법’이었다. “우리 고객과 사업 파트너들, 광고주들이 법을 어기더라도 우리는 법을 어기지 말자는 거였어요. 허다하게 조사를 받고 세무당국의 공격을 받고 법정에 섰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죠.” 하지만, 법적으론 그렇다 쳐도, 재정은 다른 문제였다. “89년 DEA의 ‘야채상인작전(Operation Green Merchant)’, 즉 마리화나 수경재배업자 집중 단속이 시작됐어요. 잡지의 핵심 광고주들이 사실 그들이었고, 우린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어요. 구독자 명단을 내놓으라는 DEA의 요구야 끝내 불응할 수 있었지만, 우린 재정적으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어요.” 케네디는 “그 시절 우리를 먹여 살린 건 경찰과 DEA, FBI였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합니다. (조사 때문이었겠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우리 잡지 구독자였거든요.”

8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한 ‘카나비스 컵(Cannabis Cup)’은, 스티븐 해거(Steven Hagger)당시 잡지 편집장이 주도한, 컨텐츠 기획 겸 재정난 타개책이었다. 마리화나 합법시장인 네덜란드의 마리화나 (재배) 거장들에게 종자와 상품을 출품케 해 최고를 뽑는 연례 대회로 11월 추수감사절 주간에 열렸다. 대회는 처음 얼마간 화제성 행사에 그쳤지만,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90년대 중반부터는 세계 유일 세계 최대의 마리화나 축제가 됐다. 참가 농민 수도 급증했고, 쿠키 등 마리화나를 재료로 한 온갖 종류의 기호품들이 출시됐다. 시연(試煙)을 위해 전 유럽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96년 캘리포니아가 의료용 마리화나를 처음 합법화한 이래 미국 북부 주들이 잇달아 동참하면서 2000년대 초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첫 카나비스컵 예선전이 열렸고, 현재는 콜로라도(덴버), 미시간, 워싱턴(시애틀), 오리건(포틀랜드)에서도 동시에 개최될 만큼 성대해졌다. 케네디는 “젊은 세대들, 농업과 식물학 화학을 공부한 재배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교배종들을 선뵈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대회는 하이 타임스 재정은 물론, 마리화나의 품종 개량과 다양화, 품질 개선, 마리화나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

케네디의 변호사 활동은 그 와중에도 이어졌고, 수임료의 상당액은 하이 타임스 운영 경비로 쓰였다. 1982년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무기를 밀수출하려다 기소된 5명의 아일랜드인 변호를 맡은 케네디는 배심원단에게 무기 밀거래가 사실상 CIA의 협조 속에 추진된 CIA의 작전이라는 ‘합리적 의심’을 제기, 무죄 평결을 받아냈다. 그는 피고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무기수출허가증을 마련해준 것이 실은 CIA였고, 범행 자체가 IRA의 무기공급원을 소련에서 미국으로 바꾸기 위한 CIA 작전의 일부라는 주장을 정황 증거들과 함께 제기했다. 검찰은 물론 억측이라고 항변했지만, 케네디는 “CIA가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입증할 책임은 정부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베스트셀러 다이어트 안내서 ‘완벽한 스카데일 의학 다이어트 The Complete Scarsdale Medical Diet(1978)’를 쓴 뉴욕의 스타 의사 허먼 타노버(Herman Tarnower)를 80년 권총으로 살해한 그의 연인이자 사립학교 교장 진 해리스(Jean Harris, 1923~2012)의 93년 주지사 사면을 받아내기도 했고, 91년에는 현 미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이바나 트럼프의 이혼 소송을 대리하기도 했다.

아내(1982년)와 여자친구(2000년)를 살해하고 2001년 이웃 노파까지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한 부동산 재벌 로버트 더스트나, 미국 마피아 최대 조직인 갬비노 패밀리의 존 고티 같은 ‘인기 없는’피의자의 변호인석에 그가 섰을 때는, 그에게 실망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5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범 등 역시 인기 없는 피의자들을 주로 변호한 마이클 티거(Michael Tigar, 1941~)를 편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티거)는 미국 사법 정의의 값어치가 사회의 천민들(pariahs)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아는 이다. 인기 있는 사람을 변호하기란 쉽다”고 말했다. 아무리 부자이고 악당이어도, 온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피의자라면 법 앞의 천민이라 그는 여겼을지 모른다.

콜로라도 주가 주민투표로 오락용 마리화나를 합법화한 건 2012년 11월이었다. 워싱턴 오리건 알래스카 주가 잇달아 동참했다. 2013년 ‘The Nation’의 좌담회는 시종 밝은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거기서 케네디는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고도 단지 마리화나를 거래했다는 이유로 20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이 지금도 있고, 종신형을 사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모두 석방되기 전까지 내 일은 끝난 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의 변호사다”라고 말했다. 앞서 2012년 케네디는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lifeforpot.com’이란 사이트를 만들어 비폭력 마리화나 사범들의 사면ㆍ석방 운동을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재선 직후 오바마에게 공개 편지를 써서 마약 전쟁의 폐해들- 무해한 이들을 전과자로 만들고,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고, 공권력의 독직과 부패를 양산한 점 등-을 지적하며 관련자 사면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 무렵 그는 암과 투병 중이었다.

사인은 폐렴 합병증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친구 포케이드의 추모행사 때처럼 비밀스럽고 비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78년은 막 싸움을 시작하던 때였지만, 그는 당당한 승자였다.

지난 2월 1일자 ‘Time’은 미국의 마리화나 산업 투자ㆍ연구기관인 ‘Arcview Market Research’ 조사 보고서를 인용, 2015년 마리화나의 합법 거래액이 54억 달러를 돌파해 전년비 17% 증가했고, 올해는 25%가 늘어 67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보고서는 2020년이면 합법 마리화나 시장이 221억 8,000만 달러 규모로 커져 미국미식축구리그(NFLㆍ2027년 250억 달러 추정)의 수익을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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