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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히어리 꽃은 노랗다.

입력
2017.04.2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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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의 봄은 노란 색깔로 시작한다. 언제부터 노란색이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숱한 젊은 영혼을 삼킨 세월호의 참극을 애도하고 구원의 소망을 기도하는 리본도 노란색이었다. 영춘화가 곡마단 천막 위 깃발처럼 노란 꽃을 피우고 개나리의 노란 합창이 뒤따른다.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생강냄새의 짙은 향기로 산 협곡의 겨울 냉기를 몰아내는 생강나무의 노란 꽃은 산수유와 많이 닮았다. 산수유의 꽃은 노란 보석이 박힌 왕관이다. 한 나무에 수백 개의 왕관이 함께 어우러진다. 이 꽃이 가을이 되면 왕관보다 더 많은 새빨간 열매를 준비한다. 얼마 전 작고하신 김종길 시인의 표현처럼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서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하는 감동이다.

히어리는 그 신선한 이름만으로는 외국종을 연상하지만 순수토종이다. 상사화가 잎을 내밀 무렵 피어나는 봄의 전령사인 히어리의 노란 꽃은 신부의 귀걸이 같아 애틋하다. 이창복 박사가 순천 송광사 부근에서 이 나무를 발견할 때 전라도 사투리인 ‘시오리(十五里)’를 ‘히어리’로 들었다는 말도 있다. 북한산의 토종 수수꽃다리 씨앗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스킴 라일락’이 되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얻어 이제는 우리가 이를 수입한다. 자생식물을 홀대하여 종자전쟁이라는 제국주의의 희생자를 자처했다. 이런 우(愚)를 범하지 않겠다고 히어리의 번식연구를 같이한 강화도 한경구 선배의 배려로 15년 전 광릉 집에 히어리를 심었다. 햇볕만으로도 잘 자라 큰키나무가 되어 내 키를 훌쩍 넘는다. 꽃이 지면 투박하고 두툼한 잎이 자랑이다. 이 히어리 세 그루를 이번 봄에 수목원으로 옮겼다. 많은 사람들과 귀한 히어리의 봄날을 공유하자는 뜻을 망설이며 받아준 아내가 고마웠다. 대신 블루베리와 아로니아 30그루를 선물해 서운함을 달래줬다.

노란 색의 봄이 열리면 토종답게 가녀린 여인 몸매의 미선나무가 소복한 하얀 꽃을 선보인다. 짧은 봄이 안타까운 돌단풍의 하얀 여린 꽃들이 목련 꽃그늘의 영접을 준비한다. 그 사이 참꽃인 진달래가 삭막한 이른 봄 산에 활기를 불어 넣으며 잿빛 나무들 사이에 혼자이듯 여럿이듯 연분홍의 존재감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나중에 피어날 철쭉의 붉은 꽃은 화장을 처음 시작한 소녀의 입술처럼 어색하게 붉기만 한 것이다.

40년이 넘는 수목원의 진달래는 사오 미터 높이의 하늘을 캔버스로 하여 꽃춤을 춘다. 고개를 젖혀 올려보아야 볼 수 있는 하늘에 떠 있는 진달래꽃의 군무가 봄이 성숙하고 있음을 알린다. 진달래나무를 독립수 거목으로 자랄 수 있게 아래 가지를 쳐주고 가지를 하늘로 뻗어 지구의 중력을 거스를 수 있게 가꾸었기에 이런 작은 행복도 함께한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가 자연스럽다. 어찌 보면 지구의 주인은 나무들이며 우리들은 잠시 스쳐가는 소풍객인데, 이제까지 사람의 눈높이로 자연을 재단했는지 모른다.

눈 속에서도 피어난다는 설중매는 창조의 미학이다. 이곳 포천은 매화꽃이 늦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매화나무’라 하고, 열매를 탐하는 사람은 ‘매실나무’라고 한다. 아무래도 매화꽃을 만끽하려면 따듯한 섬진강가의 광양까지 발품을 팔 일이다. 산수유의 꽃잔치는 덤이다.

흰색과 연분홍이 조화를 이룬 산벚의 화사한 꽃궁궐이 봄비에 씻겨 새싹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꽃비를 내린다. 팥알같이 작은 배꽃이 뭉게구름처럼 일어나는 팥배나무 꽃과 야광나무 꽃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제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는 봄밤의 정취가 새로 뽑는 대통령의 권력탐욕을 순화시켜 ‘이게 나라냐!’하는 광화문의 비명이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조상호 나남출판ㆍ나남수목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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