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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14> 박제가 vs 이덕무-급진적 개혁론과 섬세한 아포리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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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14> 박제가 vs 이덕무-급진적 개혁론과 섬세한 아포리즘 사이

입력
2004.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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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귄 지 30년인데 행장(行藏)의 본말이 서로 비슷하며 담예(談藝)하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마음이 합하여 금슬처럼 어울렸다."아홉 살 아래인 박제가(朴齊家)의 술회처럼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는 평생 뜻을 같이한 지기다.

박제가가 열 일곱 살이던 해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얼로 불우하게 살았고, 이후 서얼 문사들과 연대해 복고적인 문학에 반기를 드는 등 참으로 비슷한 길을 걸었다. 박지원 같은 혁신적 문사들과 교유하며 북학(北學)의 학풍을 흡수했고,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에 기용되어 정조의 지우를 입으며 문재(文才)를 발현했던 것도 똑같다. 두 사람은 사우(師友)이자 친우(親友)로 서로를 존중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선봉에 섰던 급진적인 개혁주의자였고, 이덕무는 섬세한 아포리즘을 통해 속습을 깨우치고자 한 모범적인 선비였다. 18세기 사상계와 문단에서 명예를 떨쳤던 두 사람은 성격과 행동도 달랐고 변혁을 꾀하는 방식도 달랐다.

거침없는 행동가의 급진적 개혁론

박제가는 우부승지 박평의 서자다. 키가 작고 이마는 튀어나왔으며 눈에는 푸른빛이 감돌았다. "천년 뒤에도 천만 명의 사람과 다른 그"로 남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는 방달(放達)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서얼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했으나 현실에 굴종하지 않았다. 그는 경세의 의지를 세상에 거침없이 드러낸 행동가였다. 처음 연경에 다녀온 후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지어 청나라와 통상하는 것만이 가난한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외쳤다. 중국문화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중국어(漢語)로 말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서슴지 않았고, 당괴(唐魁), 당벽(唐癖)으로 배척당해도 청나라에 대한 외경을 숨기지 않았다. 북학파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이었다.

실생활에서도 그는 과격하고 거침이 없었다. 품계에 따라 앉는 관습을 무시한 채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에게 대드는가 하면, 문체를 비판해 반성문을 올리라고 했더니 오히려 "문체의 고유한 맛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하는 글을 낼 정도였다. 그의 과격한 행동과 급진적 주장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다행히 정조의 보호로 무사했으나, 정조가 죽자 신유사옥(1801년)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떠나고 말았다.

행동처럼 글도 직설적이고 극단적이었다. 모호하게 절충하는 법이 없으며 좋고 나쁜 구분도 선명했다. 제도 개선을 이야기할 때든, 문학론을 이야기할 때든, 사람을 묘사할 때든 자기 주장이 분명하고 의지가 확고했다. 그리고 복잡하게 말하지 않았다. 박제가는 모든 규범, 관습,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해 직언을 날렸고, 고루한 습속과 편견에 갇힌 의식을 가장 미워했다. 그에게 천지자연을 비롯한 모든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늘 살아 움직이고 변한다. 고정관념은 '흙으로 빚어진 죽은 우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에게는 사회와 문화도 변해야 하는 것이었다.

박제가에게 있어 변화는 진보와 발전을 향한 변화이며 이상적 세계로의 도약이다. 그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정신적, 문화적으로도 윤택한 삶을 누리기를 원했다. 그래서 예술과 기예와 문학의 가치를 유독 강조했다. 문명의 나라는 물질의 풍요와 문화적 가치가 서로 뒷받치며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틀에 박히거나 진부한 글쓰기를 거부하고, 참신하고 기교 있는 글쓰기를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세계가 변하고 성음(聲音)도 변하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글을 써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과거의 시를 답습하거나 의고(擬古)를 훌륭하다고 보는 인습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개성이 살아있는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그것을 문사의 의무로 여겼다. 그의 개혁사상 안에서 사회, 문학, 예술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참신하게 변할 대상이었다. 경세가, 문장가, 예술가 박제가의 일생을 관통하는 것은 '변혁에의 열망'이었다.

소심한 모범생의 섬세한 아포리즘

이덕무는 정종의 별자(別子) 무림군의 후손이다. 호리호리한 큰 키에 단아한 모습, 청수(淸秀)한 외모처럼 행동거지에 일정한 법도가 있고 문장과 도학에 잠심(潛心)하여 이욕이나 잡기로 정신을 흩뜨리지 않았다. 사람 축에 끼지 못하는 서얼로 오직 책 읽는 일만 천명으로 여겼다. 하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그는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수백 권의 책을 베꼈다. 글자나 사실(史實)에 대한 고증부터 역사와 지리, 초목과 충어(蟲魚)의 생태에 이르기까지 지적 편력은 실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책으로 천리를 통했고, 고증과 박학의 대가로 인정 받았다.

그는 박제가와 달리 현실개혁을 주장하지 않았다. 경세제민 같은 대의도 말하지 않았다. 남에게 드러내기 꺼려하며 자신을 단속할 뿐이었다. 그래서 도의에 어긋나는 자잘한 세태를 경계하며, 사소한 예절과 품행을 중시했다. 그래서 이덕무는 소설을 읽는 박제가를 나무라며 함께 '논어'를 읽자고 권유했다. 반성문을 순정하게 쓰라는 당부도 아끼지 않았다. 이덕무는 고지식하고 소심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선비의 초상 그 자체였다. 단아한 성품과 뛰어난 학식 덕택에 그는 죽어서도 행복한 사람으로 남았다. 정조는 그의 식견과 재주를 아껴 내탕금(內帑金·임금의 개인 돈)을 내려 문집을 간행해주었고, 기라성 같은 선배 문인들이 그를 기리는 글을 써주었다.

그는 박제가처럼 현실개혁을 외치는 글을 써본 적도, 극단적인 발언을 해본 적도 없다. 다만 새로운 글쓰기를 통해 당대의 글쓰기와 가치 체계에 조용한 의문을 던졌다. 그의 「문집에는 시, 기(記), 서(序), 서간과 같은 전통 한문학을 제외하면 아포리즘 형식의 짧은 글쓰기가 절반 이상이다. 명, 청대의 소품체를 전폭 활용했다.

그의 글에는 독서일기, 고증, 잠언, 생활 묘사, 자연의 풍광, 동식물의 생태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관행에 비추어볼 때 이런 글은 문사의 글쓰기로 취급 받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런 자잘한 글은 경술(經術·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이나 이념을 담는 문장, 전범이나 고전의 격식을 갖춘 문장과는 완전히 다른 자리에 놓인다. 자잘한 메모와도 같고, 힘들이지 않은 에세이와도 같은 글들은 한담거리로나 취급될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덕무는 이런 글에 주력했다.

이유가 있다. 박제가처럼 이덕무 또한 전대의 글을 답습하거나 진부하게 표현하는 경향을 거부한 것이다. 또 이미 알려진 세계를 반복해서 재현하는 것도 피했다. 좋은 글이란 세계와 직접 대면해서 개성이 살아있는 자기만의 표현을 찾을 때 이루어진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관념세계보다 천지자연의 미묘한 움직임, 은미한 자연세계, 자잘한 생활세계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런 세계를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적인 시야가 더 필요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덕무가 명청(明淸)대의 소품체를 만나 재창조한 글쓰기는 의의가 자못 크다. 바로 고문의 격식과 문체, 성명(性命)과 치도(治道)를 문장의 도로 삼아야 한다는 글쓰기의 절대원칙에 의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실험의 시대, 만개한 두 개성

이덕무와 박제가는 신사조를 받아들여 변화를 꾀하되 다른 방식으로 변용하면서,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각자의 자리를 마련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외부를 탐색했다는 점에서 둘 다 독보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둘이 똑같은 방식으로 고정관념에 도전했다면 진정한 라이벌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용히 전범을 깬 이덕무, 전위임을 외치며 습벽에 응전한 박제가. 그 둘의 조우가 서로의 개성을 마모시키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튀어오르게 한 점이 그들을 문제적 인물로 빚어낸 동인인 것이다.

글쓰기 방식이 다채롭게 실험되던 정조 시대, 다양한 사고들이 들끓으며 공존하고 파열했던 18세기. 여러 혁신의 사고가 부딪쳐 만들어 내는 변혁에의 열망들. 이덕무와 박제가의 글이 지금 읽어도 생동감 있는 것은 그들이 그런 시대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유별난 개척의 정신과 뛰어난 문재(文才)로 참신한 문장 속에 녹여낸 결과이다.

길진숙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원

● 이덕무

1741년 서울에서 태어나 1793년에 별세했다. 종실의 후손이지만 서얼 출신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39세에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기용돼 책 읽는 일에 몰두해 스스로 간서치(看書痴)라 했다. 소품체의 다채로운 아포리즘이 문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규장전운(奎章全韻)' 등의 관찬서를 편찬했고,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가 전한다.

● 박제가

1750년 박평(朴坪)의 서자로 서울서 태어났다. 30세에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에 발탁됐으나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유배갔다가 1805년 풀려나 죽음을 맞았다.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문물의 선진적 경향을 받아들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급진적 개혁안을 주창했다. 폐습을 깨고 청과 같은 문명사회로의 변혁을 꿈꾸며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고 문집으로 '정유집(貞 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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