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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과거에 빠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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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과거에 빠진 대통령

입력
2015.11.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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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국회의원의 빈소에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보낸 조화가 놓여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뉴시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부친인 유수호 전 국회의원의 빈소에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보낸 조화가 놓여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조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뉴시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유승민 의원의 상가(喪家)는 그야말로 여야와 계파를 초월한 정치인들로 넘쳐났다. 정계를 은퇴한 뒤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문상을 왔고 투병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은 조화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여의도 국회를 대구로 옮겨놨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숱한 정객들이 대구까지 내려오거나 조화를 보냈지만 청와대에서 온 조문객은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심지어 그 흔한 근조화환 하나 보내지 않았다. 청와대는 “유족이 부의금과 조화를 사절한다 했고 이런 경우 보내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밝혔지만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조화를 보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좀 옹색한 변명이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문상객들 사이에서는 “대통령 뒤끝이 장난이 아니네”라는 말이 흘러 나왔다. 몇몇 객은 대통령을 아끼는 듯한 말투로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지 말라고 직접 지시를 했겠어? 문고리라는 사람들이 대통령 심중을 짐작해 알아서 조치한 거겠지”라는 추론도 내놓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정치인은 “그렇고 말고, 대통령이 지시를 내렸다면 조화를 보낸 이병기 실장은 하극상이 되는 게지”라는 추임새도 넣었다.

많은 조문객이 유 의원을 위로하기 위해 내려왔지만 고인(유수호 전 국회의원)을 만나러 불원천리(不遠千里) 달려온 이도 적지 않았다. 내년 총선을 향해 공주에서 열심히 표밭을 갈고 있는 정진석 전 의원은 선친(정석모 전 의원)과 고인의 남달랐던 친분 때문에 “만사 제치고 왔다”고 했다. 유 의원의 카운터파트였던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물론 유족을 만나러 왔지만 사촌형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과 고인의 정치적 인연을 특별히 강조하기도 했다.

고인과의 인연으로 치면 박 대통령도 없지 않다. 물론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의 선친(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인을 정계로 인도한 셈이다. 1973년 사법파동 당시 유신반대시위를 벌인 학생을 석방하는 결정으로 법복을 벗지 않았다면 고인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일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대에 걸친 묘한 인연이다’는 상념으로 상가를 나서는 길에 ‘박 대통령이 끝내 유 의원 상가를 외면한 것 또한 선친과 고인의 악연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국회법 파동의 앙금을 아직 버리지 못한 것도 안타깝지만 정녕 고인을 선친과 함께 떠올렸다면 업보도 이런 업보가 있을까 싶다.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설파한 적이 있지만 박 대통령의 과거와 대화는 세계적 역사학자의 통찰을 넘어서는 수준이다. 박 대통령이 정치하는 이유로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공공연히 꼽고 있다는 점에서 대화의 상대는 특히 선친에 집중돼 있는 것 같다. 무리한 역사교과서 국정화 드라이브도 산업화 시대의 공과를 제대로 평가해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과거지향적 신념과 분리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창의적인 역사관도 제시했다. 그러나 국정화가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조차 “최선은 아니지만…”하고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면 청와대 참모나 국정화에 총대를 멘 교육부 관리들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일전에 청와대 모 인사에게 “국사편찬위원 전체를 물갈이한다든지 검정체제에서도 방법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 인사도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과거와 대화에 빠진 대통령이 과연 현재를 중심으로 미래를 설계한다거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같은 맥락에서 박 대통령이 주창하는 통일이 공허하다는 분석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맹목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국정화 정국에서 민주화니 산업화니 하는 구시대와 단절한 또는 부채의식 없이 당당하고 후레쉬한 최고 지도자를 상상해 본다.

김정곤 정치부장 jk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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