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총리 유임
정홍원 국무총리가 26일 박근혜 대통령의 사표 반려로 ‘시한부 총리’의 딱지를 떼고 사실상의 총리 임기 2기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책임론을 안고 있는데다 두 번의 후임 총리 내정으로‘짐을 쌌다 풀었다’를 되풀이한 상황이어서 “내각 수장으로서 영이 설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 총리는 이날 청와대의 사의 반려 발표 직후 서울정부청사에서 간부회의를 주재하며 “필요한 경우 대통령께 진언을 드리면서, 국가적 과제를 완수해 나아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간 ‘대독 총리’‘의전 총리’라는 비판을 받았던 것을 감안해 책임총리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책임 총리 구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통령의 의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정 총리가 박 대통령의 기존 국정 운영 방식에 변화를 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 대통령의 정 총리 유임 조치 자체가 기존 국정 운영 스타일의 고수로 보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이다.
더구나 정 총리는 사의를 밝힌 지난 4월 27일부터 사표 수리만 기다리는‘시한부 총리’로 2개월 가량을 보내 사실상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다. 정 총리는 ‘시한부 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제가 물러나는 입장에서 얘기하기 적절치 못하다”며 의원들의 질의에 맥 빠진 답변을 했고, 여야 의원들도 정 총리를 ‘퇴임 총리’로 간주해왔다. 이미 정치권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도‘헌 총리’로 각인된 정 총리가 새롭게 권위를 갖고 내각을 통할하거나 국회에서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 전에도 총리나 부처 장관의 사표가 반려되는 사례가 종종 있긴 했으나 그 자체만으로 리더십에 타격을 입어 직무를 오래 수행하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 때인 1994년 10월 이덕우 총리가 성수대교 붕괴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가 3일 뒤 반려됐으나 사고 수습이 마무리된 같은 해 12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정 총리는 사표 수리 방침까지 나왔다가 반려된 초유의 사례라는 점에서 리더십 실추는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정 총리의 사표가 일단 반려되긴 했으나, 7ㆍ30 재보궐 선거가 끝나고 국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새 총리 카드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7ㆍ30재보선에 앞서 총리 인선을 할 경우 야당에 정치적 공방의 빌미만 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재보선까지 정 총리로 밀고간 뒤 9월쯤 후임을 뽑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이번 조치가 “총리가 없이도 국정을 이끄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이 은연중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권위가 실추될 대로 된 만신창이 총리를 그대로 앉힌 것은, 역으로 국정을 수행하는 데 총리가 누구든 상관 없다는 얘기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간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국무총리의 위상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는데, 이번 조치가 무기력한 총리제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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