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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풍엔 운동이 약이라지만… 농사꾼이 헬스클럽 가긴 쑥쓰러워

입력
2015.04.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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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흐드러졌는데 오토바이 타고 가는 곳은 농장

시골이 건강엔 좋다지만 장날 병원 앞은 문전성시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던 동네 동생이 넘어진 관리기에 시동을 걸고 있다. 물을 받기 전에 논두렁을 손보지 않으면 두더지 구멍으로 물이 새 나가 고생하게 된다.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던 동네 동생이 넘어진 관리기에 시동을 걸고 있다. 물을 받기 전에 논두렁을 손보지 않으면 두더지 구멍으로 물이 새 나가 고생하게 된다.

오토바이 타기 좋은 날씨다. 적당하게 시원하고 딱 알맞게 촉촉하다. 널널한 섬유조직 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기분 좋게 소름을 돋운다. 후다닥 뛰어들었던 벚꽃은 잡아 먹히듯 사라졌고, 꽃 따라 몰려들던 고급 승용차들과 신부 화장한 아줌마들도 개 복숭아꽃 따라 사그라드니 이제 조용한 봄이다. 그래도 여전히 화려하다. 언제들 심어 놓으신 건지 지천에 철쭉이 엎드린 자세로 널브러지고 지리산엔 연두빛 신록이 봄 단풍처럼 솟아오른다. 농장 가는 길, 그 집 앞 지날 때마다 뭔 웬수진 놈처럼 짖어대던 누렁이도 풍경 감상을 하는지 오늘은 먼 산만 바라보며 나를 무시했다. ‘개 무시’를 당해도 봄은 봄이다.

다른 계절 이름과 다르게 봄만 한 글자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다 그렇단다. 맞는 것 같다. 눈, 코, 입, 귀, 밥, 술, 똥. 아주 먼 옛날 사계절이 순환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이 간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열매도 떨어지고 껴 입을 것도 없던 시절, 이대로 점점 추워지다간 제 명에 못 죽겠다 싶던 때 땅에서 먹을 풀이 돋고 날은 따스해지고 형형색색 꽃이 피니 죽다 살아난 기분 아니었겠나. 요즘 말하는 회춘(回春)하고는 댈 게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좋은 봄, 이 화려한 봄날 오토바이의 종착지는 맨날 농장이다. 농장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봄비 내리고 따스한 바람 불더니 뭐든지 쑥쑥 자란다. 농막 주변은 핏빛 철쭉이 감쌌고 감나무 주변의 호밀은 다리 짧은 주인의 가랑이까지 간지럽힌다. 감자 밭과 마늘 밭 옆의 맨땅은 어느새 냉이 꽃이 하얗게 덮었고 온갖 야생화가 산으로 이어진다. 말이 좋아 야생화이지 사실 나한테는 그냥 잡꽃이다. 베고 뽑고 갈아 엎어야 할 것들. 지난달 일주일에 걸쳐 말끔히 뽑아냈던 마늘밭 풀들은 왕겨 밑에 숨어있다가 시간차 공격을 하고 있고, 아직 제초매트를 덮지 않은 감자 밭에선 새끼 풀들이 스물 스물 올라온다. 잡초란 놈들이 매일 째려보면 그나마 더디 자라는 것 같은데 어쩌다 하루 걸러 농장에 가보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하듯 훅 올라와 있다. 하루만 걸러도 그러할진대, 일주일 만에 가 본 농장은 지들 세상이었다.

3월초 발가락에 통풍의 습격을 받은 후 약 한달 정도 술과 고기를 멀리하니 몸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허리띠도 칸 수가 줄었고 화장실에서도 황금색을 볼 수 있었다. 몸의 형태가 애초부터 날아갈 듯 가볍기는 어려웠지만 기분은 둥둥 떠다녔다. 그러던 4월 초, 좋아하는 후배 부부가 꽃구경을 겸해서 구례에 내려왔고 약간의 객기가 발동했다. 술 종류 중에 그나마 괜찮다는 와인과 기름기 쪽 뺐을 것이라고 맘대로 생각한 족발을 준비해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나름 채소를 곁들여 먹었고 ‘정화된 몸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라며 적극적으로 안심하고 한껏 먹었다.

이튿날 저녁, 후배 부부가 상경한 후 극심한 통증이 다시 쳐들어왔다. 정신 못 차린 건방진 심신에 채찍을 가하듯 이전보다 훨씬 강한 놈이 찾아왔다. 밤새 끙끙거리며 ‘일단 잠은 좀 자고 아프면 안되겠냐’고 기도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내 잘못이 컸다. 덜 나쁘다는 것이지 좋을 것까지는 없는 술을 마냥 마셨고, 물에 삶았다고 기름기 없어진 게 아닌 고기를 폭풍 흡입한 탓이다. 채소를 곁들여 먹었다지만 그만큼 고기를 덜 먹은 게 아니라 그냥 그 채소만큼 더 먹은 결과였다.

다음날 논두렁 보수작업을 같이하기로 했던 동생이 전화했다. “아이 행님, 시골에 와서 몸이 좋아져야지 왜 더 주저 앉는다요. 행님 혹시 밤일 허고 댕기는가요?” 총각 놈이 뭔 밤일에 대해서 안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떻게 밤일을 하면서 돌아 댕기겠는가. “그전부터 있었던 병이야. 겨우내 먹고 놀았더니 하늘에서 경고하는 거지 뭐.” 일주일간 양말도 신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통풍 질환은 고마운 신호다. 중년에 흔히 찾아오는 당뇨병이나 고혈압에 비하면 몸에 큰 이상을 남기지는 않는 대신 극심한 고통을 받아 정신이 번쩍 차려진다. 5년 전 회사에서 야근을 하다가 처음 발가락이 아파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검사 결과도 나오기 전에 통풍을 예견했다. “스트레스 많이 받을 거구 술 자리 잦으실 거구, 야근 같은 거 자주 하시나요?” 점쟁이였다. 뭐 하나 ‘아닌데요’라고 대들 수 없었다. “통풍이 확실할겁니다.” 역사적으로는 나폴레옹이 통풍으로 고생했다는 게 첫 기록이란다. 그래서 ‘귀족병’이라고도 한단다. 그러고 보니 짧고 굵은 게 나도 딱 나폴레옹 체격이다. 귀족은 아니지만 그만큼 먹어대서 생기는 병이란다. 시골에 내려와서는 야근도 안하고 생활도 바뀌었지만 먹는 양은 줄지 않아서 또 그랬나 보다. 남들은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으려고 물 좋고 공기 맑은 곳에 내려온다는데, 나는 그 덕에 숙취 없고 고기 값 저렴하다고 냅다 먹어 제낀 탓이다.

뭐든 운동이 좋은 처방이지만 대부분 노동만 있지 운동은 드물다. 이곳 어르신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농사일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은 피해갈 수가 없다. 흔히 말하는 ‘골병’이다. 부적절한 자세로 무리한 힘을 반복적으로 쓸 때 생기는 병이다. 쑤시고, 얼얼하고, 부러질 듯 아프고, 무감각해지는 이유다. 의사들간에 “시골에 내려가 정형외과 차리면 망하진 않는다”는 말이 있다는데 실제로 그렇다. 특히 장날이면 아침 7시부터 병원 앞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진료는 9시부터’라고 큰 글씨로 적혀있고 병원 한 두 번 다녀보신 것도 아닐 텐데 그 추운 겨울에도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는 병원 입구 자리부터 잡으시는 게 중요한 일이다.

아직 나름 젊다는 나도 손목이나 팔꿈치가 시큰거린다. 하루 종일 호미질을 하거나 갑자기 자빠지는 관리기를 버팅기며 일으켜 세우려다 무리가 생긴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아프다고 하면 바로 침이나 뜸을 권유한다. 아내는 흔히 말하는 ‘야매 침쟁이’다. 톡톡한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침이 무섭고 싫다. 침을 맞다가 ‘이 사람이 평소 감정을 침으로 푸는 거 아니야?’ 싶을 만큼 아플 때도 있는데,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한 대 후려칠 수도 있을 것 같아 침보다는 뜸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뜸이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예상할 수 있는 고통인지라 소리 좀 지르고 나면 때리고 싶은 마음은 안 생긴다.

풀 뽑느라고 손아귀가 아프다고 하자 아내가 바로 침을 꽂았다. 얼떨결에 손을 내줬지만 보기만 해도 으스스하다.
풀 뽑느라고 손아귀가 아프다고 하자 아내가 바로 침을 꽂았다. 얼떨결에 손을 내줬지만 보기만 해도 으스스하다.

아내는 “그러다가 당신도 금방 골병 들어. 운동해야 돼”라고 노래를 하지만 농사 지으면서 운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배드민턴 동호회도 있고, 읍내에 실내수영장도 있고, 곳곳에 헬스클럽도 있지만 왠지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예외도 있다. 엊그제도 감자 두둑에 제초 매트를 덮다가 힘이 들어 농막에서 쉬는데 장씨 아저씨가 들어오셨다. “일은 안 허고 맨날 앉아 있는가?” 아닌 건 아니지만 일단 정색을 했다. “아저씨는 꼭 저 쉴 때만 들어오세요. 지금껏 빠지게 일하다가 잠깐 쉬는 건데.” “한 10분 일 허고 한 시간씩 쉬는 갑네. 시원한 물 있으면 좀 줘봐.” 모자며 셔츠가 흠뻑 젖어있었다. “일 하셨어요?” 맥주 한 잔 들이킨 듯 ‘캬~’ 소리를 내시더니 한 컵 더 달라신다. “일은 무신 일이여. 놀러 갔다 왔지. 자전거 타고 산동꺼정 갔다 오니라고.” 왕복 40km정도 되는 길이다. “안 힘드세요? 백리길인데.” “힘은 무신 힘이 들어. 평지루다가 설렁설렁 다니는 걸. 아, 좀 좋은가. 아침 일 좀 해 놓고, 자전거 좀 타고 놀다가, 저녁에 좀 일하고, 밥 먹고 자고. 뭐 농사 그런 맛에 짓는 거지 뭐.” 언제쯤 나도 아저씨 농사맛을 볼 수 있을 모르겠다.

씨나락을 물에 담궜다. 한해 논농사의 출발점이다. 작년 가을 거둬들인 벼 중에 봄 파종을 위해 남겨뒀던 종자다. 겨우내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유기물이 물에 닿으면서 다시 생명으로 깨어난다. 봄에 치르는 소중한 과정이다. 병충해에 강한 외국 종자가 우리나라 상륙준비를 하고 있단다. 들어오면 씨나락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재 파종을 금할 뿐더러 하려고 해도 유전자가 꾸며져 있어 다음해에 씨가 되질 못한다. 어쩌면 귀신이 까먹을 씨나락도 안 남을지 모른다.

키다리병 방제를 위해 뜨거운 물에 10분간 담그는 온탕소독 절차를 마치고 전 이장님 댁에 마련된 물통에 씨나락을 부었다. “애썼네. 이제 나락농사 절반은 지은 셈이여.” 이제는 나머지 절반이 훨씬 길다는 걸 알지만, 어르신의 거짓말은 항상 듣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한다. 허리도 안 좋고 최근 기력도 달리신다고 했다. “아버님 기운이 없으시다면서요. 내일 제가 올 테니까 물 가는 일은 놔두세요” 해도 “이까짓 거 뭐 힘든 일이라구” 하신다.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아이구 그거 힘든 일이야” 하시는 말씀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다시 농장으로 오는데 허리를 굽히신 할머니가 입구쯤에 계시는 게 보였다. 멀리서 봬도 간전댁할머니다. 할머니는 무릎이 편찮아서 쪼그려 앉질 못하시고 선 채로 허리를 굽혀 밭일을 하신다. 할머니가 허리를 굽히시면 낫처럼 둥글게 되는 게 아니라 ‘ㄱ’자 처럼 완전히 꺾인다. 흉내를 내려고 해도 오금이 댕겨서 할 수 없는 자세다.

“할머니 왜 또 말씀도 없이 오셨대요! 또 고사리 끊으러 오다 보니께 선재네 농장이여, 이러실라고 그러죠?” 허리도 안 펴고 씩 웃으신 할머니는 농장 울타리 근처 풀을 매 주셨다. “전화라도 주고 오시라니까요!” 그냥 또 웃으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잘 안 들렸다. 굳이 들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의도적인 동문서답이다. “감나무 고랑에 미나리가 확 번지고 저 짝에 쑥부쟁이가 퍼졌는디...”

잠시 농기구를 다시 챙겨 놓고 할머니한테 갔다. “할머니 이제 그만 가시게요. 모셔다 드릴게요.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가야 해요.” 할머니는 하늘을 향한 엉덩이를 내 쪽으로 돌리시며 “선재 아빠, 가세요. 나야 가든진 말든지 내뿌러 둬요.”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정을 했다. “할머니 요즘 편찮으셨다면서요. 이러다 쓰러지세요!” 소용없었다. “이 나이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딨다고 그런당가요. 아픈 게 당연한 거지. 그러고 이러다 쓰러지믄 그거야 내 팔자지. 이렇게 일하다 가면 좀 좋아요. 얼릉 델꼬 갔으면 좋겠구마.”

먹다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일하다 돌아가시면 좋겠다는 할머니 말씀은 진심일까. 난 한참 멀었나 보다.

前 한국일보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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