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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권력구조 바뀌면 국민 삶이 나아질까

입력
2016.10.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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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가치 외면한 개헌 제안의 허구성

민주적 리더십이 권력구조 못잖게 중요

시스템 개혁으로 참 문민통제 실현해야

노무현은 제왕적 대통령을 거부했다. 국민이 왕이고 대통령은 신하라 여겼다.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 2005년 7월 기업인들에게 한 얘기다. “기껏 뽑아 줬더니 시장(자본)에 굴복하겠다는 거냐”는 비판이 일었다. 그래도 그는 정부의 강압이 작동하는 권위주의 시대의 관치경제에서 벗어나 자율적 시장경제를 지향했다. 경제 성장의 주도권을 시장에 넘겨 주고 정부는 복지를 통해 국민 삶의 질 향상에 주력하는 게 ‘정상적 민주주의 국가’라고 믿었다. 권언유착을 끊고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도 보장했다.

그가 바라던, 시장과 정부와 개인이 자율적이고 투명하게 기능하는 정상적 민주주의 국가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임기 말 극단적 정쟁을 유발하는 5년 단임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개헌론을 폈으나, 그의 천성적 선함 뒤에 자리한 의지박약이 한몫 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기득권층의 반발에 밀려 공정한 시장원리가 작동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최고 권력자가 통제의 끈을 놓는 순간, 권력기관들이 각개 약진하며 국민의 상전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제도ㆍ법적 장치를 통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기관으로 개혁하는 대신 “대통령 못해 먹겠다”며 손을 놓아버린 탓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그도 자서전에서 뒤늦게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고 술회했다.

해방 정국의 지식인들은 삼권귀일(三權歸一) 원칙에 따라 입법 사법 행정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면서도 국민에 의한 통제가 이뤄지는 체제를 꿈꿨다. 권력 분립과 문민 우위의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려는 논의가 활발했으나 미 군정은 손쉽게 친일 판사와 관료와 순사에 의존하는 길을 택했다. 친일 보수엘리트가 행정과 사법의 주축으로 등장하면서 권위적 통치 시스템이 자리 잡았고, 그 정점은 개발독재로 상징되는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는 절대 권력을 휘두른 군주였다. 국민은 신민이요, 통치 대상이었다. 권력기관은 말을 듣지 않는 국민을 겁박하는 충견이요, 관료와 재벌은 든든한 지원군으로 기능했다.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뿌리 깊었다. 권력기관과 관료, 재벌을 정치권력의 도구로 활용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장에 넘어간 권력을 되찾아 오고 권력기관을 충견으로 만들며 언론의 펜을 무디게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재벌 총수 잡아넣고 검찰총장 목을 자르고 언론 약점을 건드리는 순간, 재벌도 검찰도 언론도 바싹 엎드렸다.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한 대통령이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을 주도하겠다고 나섰다. 국정에 우선하는 사이비 권력을 비호해 온 그의 존재 자체가 역설적으로 개헌의 필요성을 웅변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정부형태를 고민하지 않는 건 직무유기다. 그래도 이 정권은 개헌을 논할 자격이 없다. 그간의 일방 통행식 국정 운영과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 자체가 헌법 파괴적이다. 자유, 인권, 정의라는 헌법 가치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의 개헌 제안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없는 까닭이다.

권력구조가 바뀐다고 불평등이 완화되고 국민 삶이 나아지리란 보장도 없다. 정파 간 권력 나눠 먹기에 그칠 수도 있다. 국민을 위한다면 기본권 향상과 권력에 대한 진정한 문민통제를 실현하는 전면 개정이 돼야 한다. 헌법이 우리네 삶의 기본 틀이긴 하나 현실의 삶에서 그 정신을 구현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이념적 편향과 선민의식에 젖어 국민 위에 군림해 온 검찰 등 권력기관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시장의 반칙을 제어하는 건 헌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헌법 수호의 의지를 지닌 민주적 지도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내년 대선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세운 뒤 충분한 시간을 갖고 국민이 참여하는 개헌을 추진하는 게 순리다. 관료 재벌 노동귀족 등 기득권층의 이익에 봉사해 온 국가시스템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하는 작업도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불평등이 완화되고 국민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고재학국장02] 고재학 논설위원 /2016-01-15(한국일보)/2016-01-15(한국일보)
[고재학국장02] 고재학 논설위원 /2016-01-15(한국일보)/2016-01-15(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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