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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이민화 장관'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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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이민화 장관'은 어떤가

입력
2010.11.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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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로선 이민화 씨가 눈치 없고 분수 모르는 사람이었을 게다. 기업호민관이 정부의 규제개혁 의지에 따라 마련된 차관급 자리라고 해도 조직 규모가 중소기업청 파견 공무원을 포함해 10명 남짓하고 한 해 예산이 10억 원도 되지 않는다면 진작에 감을 잡아야 하는데 과욕을 부렸으니 말이다. 더구나 미국의 중소기업 옴부즈맨을 본땄다고 해도 총리가 위촉하는 무보수 명예직이라면, 그저 3년 임기를 잘 때우고 가라는 신호를 충분히 준 것 아닌가.

호민관 1년은 '9ㆍ29대책' 초석

의료기기 전문업체 메디슨 창업자이자 벤처신화로 유명한 이씨가 지난해 7월 기업호민관을 맡을 때부터 대기업은 물론 정부와의 불화는 이미 예견됐다. 일찍이 개방-소통-협업에 기초한 '정부 2.0 시대'를 주장해온 그는 경험을 토대로 300만 중소기업과 호흡하며 제대로 된 개혁을 하고 싶었다. 반면 지원과 통제 패러다임에 익숙한 정부는 자기 역할과 몫을 내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정치권도 중소기업을 생각하는 척 시늉만 했다. 법까지 개정해 독립기관 운운하며 요란을 떨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인적ㆍ물적 지원장치는 사실상 백지였다.

알다시피 호민관은 로마시대에 평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뽑은 대표로,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원로원의 집정관을 견제하는 직책이다. 이 이름이 좋았던 이씨는 우선 기업호민관실의 인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열린 조직을 지향했다.'호민net'라는 이름으로 전문호민관 지역호민관 협력호민관 등 자원봉사그룹을 규합했고 중소기업학회 등과의 제휴를 통해 외연을 넓히며 내부역량을 키웠다. 14만 중소기업인이 참여하는 '호민레터'는 현장과 직접 소통하며 정책자료를 구하는 샘물이다.

이런 열정으로 그는 1년 만에 1,200여건의 크고 작은 중소기업 규제와 민원을 해결했다고 자부한다(돈으로 환산하면 2조원이 넘는단다). 10년 묵은 규제인 공인인증서 강제 사용의 덫을 풀고, 민원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는 비보복 정책, 패자부활을 막는 연대보증제 개선은 큰 반향을 낳았다.

문제는 호민관실 출범 1주년을 전후해 대ㆍ중소기업 불공정거래 관행에 칼을 빼든 데서 시작됐다. 정부로서는 자신의 영역과 권한을 침범하는'불경'이었고, 대기업에겐 턱에 비수를 들이대는'도전'이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왔지만, 때마침 불어온 '공정사회'담론과 언론의 관심, 중소기업계의 지지로 버텨냈다. 그 결과 발주-납품-결제와 기술보호에 이르는 전 과정에 만연한 갑을관계의 불법ㆍ불합리한 관행을 공론화했고, 중소기업계의 숙원을 담은 20여 개의 대안도 마련했다.

마침내 9월29일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한'대ㆍ중소기업 동반성장 전략회의'에서 공정거래 질서확립, 중소기업 자생력 강화지원, 추진ㆍ점검체계 구축 등 4개 부문에 걸쳐 의미 있는 대책이 나왔다. 징벌적 배상제 등 일부를 빼면 호민관실의 대안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이씨도 획기적 성과라고 박수를 쳤다.

관건은 실천을 담보하는 장치였다. 이씨는 7월부터 준비해온 기업협력평가지수 이른바'호민인덱스'에서 답을 찾았다. 발주시스템, 납품단가 협의, 민원 보복 등의 기준으로 대기업의 상생의지를 측정하는 지수를 개발해 반기 또는 분기마다 발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청회부터 제동이 걸렸다. 정부가 이미 동반성장지수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주제넘게 호민관실이 왜 나서느냐며 압박해왔다. 단가 협상이 집중되는 연말이 다가오는데도 정부의 적극적 움직임이 없자 이씨는 직접 호민레터를 통한 업계 실태조사를 시도했다. 정부는 유례없이 파견 공무원의 협조 거부를 지시, 조사메일 발송 자체가 무산됐다. 이씨는 곧바로 사표를 던졌다. 언젠가 이런 때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파수견'없는 동반성장은 개그

관료와 대기업의 벽을 실감케 한 이 호민관의 사퇴 전말이다. '파수견'을 잃은 9ㆍ29 대책도 여느 정책처럼 골방에서 먼지만 뒤집어쓸 공산이 커졌다. 상생과 동반성장 구호를 허무개그로 만들지 않으려면 청와대가 나서 이번 파동의 맥을 잘 짚어봐야 하는 이유다. 의기투합하고 배짱이 맞는다면 '이민화 장관'도 하나의 대안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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