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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大 출신 마약상 “마리화나 합법화하면 세상은 오히려 안전해져”

입력
2016.04.30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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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막스는 역사상 가장 신사적이고 교양 있는 마약상으로 불렸다. 그는 ‘영화배우 같은 목소리에 로커 같은 외모’로, 또 유쾌하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그는 마리화나를 사랑과 평화의 매개체라 여겼고,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가로 여생을 보냈다. 홈페이지 howardmarks.name
하워드 막스는 역사상 가장 신사적이고 교양 있는 마약상으로 불렸다. 그는 ‘영화배우 같은 목소리에 로커 같은 외모’로, 또 유쾌하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그는 마리화나를 사랑과 평화의 매개체라 여겼고,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가로 여생을 보냈다. 홈페이지 howardmarks.name

“가장 교양 있는 마약 거물”

과학철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

60년대 재학 중 온갖 약 경험

히피문화 명분 마리화나 거래

영화 같은 인생

혼자 일하며 강력 범죄와 거리

캐나다로 한 번에 30톤 밀수도

한때 英ㆍ美 정보기관과 협력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

출옥 후 베스트셀러 작가 변신

신문칼럼ㆍ방송 통해 주장 전파

英 하원선거 출마 공약 삼기도

하워드 막스(Howard Marks)는 1970~80년대 거물급 국제 마약업자였다. 그는 조직 없이 혼자 일했고, 헤로인이나 아편 같은 ‘하드 드럭(hard drug)’에는 눈 돌리지 않고 오직 마리화나만 거래했다. 마피아 삼합회 등 범죄조직은 물론이고 대서양 양편의 국가정보기관들과도 얽혀 활동했지만 폭력ㆍ살인에 연루된 적 없었고, 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살자고 동업자를 판 적도 없었다. 그가 특별해 보인 건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옥스퍼드대 출신으로 “롤링 스톤(아마도 믹 재거)의 외모와 리처드 버튼의 목소리”를 지녔고, 또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다윈과 리처드 파인만, 칼 세이건을 대화에 섞을 수 있는 교양과 세련된 매너, 막대한 부와 후한 인심, 거기다 ‘일’에 대한 구김살 없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그에겐 있었다. 한 번에 많게는 수십 톤씩 마리화나를 거래하면서도 그는 자신을 범죄자라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법의 늦됨과 옹졸함을 나무랐다. 그의 께름칙한 이력에 적잖은 이들이 관대했던 이유들이었다.

80년대 말 미국서 실형을 산 그는 작가로 변신해 자서전과 스릴러 소설을 썼고, 신문칼럼과 방송, 인기 음악인들과의 공연 등을 통해 마리화나 합법화 운동에 몰두했다. 말년의 그는 직장암과 투병하며, 넉넉하지 않은 인세와 옛 명성(지인들의 호의)에 기대 살았다. 그것도 대중의, 언론의, 군침 도는 이야깃거리였다. 종부성사를 권하듯 기자들은 그에게 ‘후회 없느냐’고 물었고, 그는 끝내 행복했노라고 유쾌하게 맞섰다. ‘미스터 나이스(Mr. Nice)’ ‘나르코 폴로(Narco Polo)’ ‘역사상 가장 교양 있는 마약 거물’등으로 불렸던 그가 4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하워드 막스는 대전 직후인 1945년 8월 13일 영국 사우스웨일즈 브리지엔드 시 인근 켄피그 힐(Kenfig Hill)이라는 작은 탄광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형제 중 유일하게 광부가 아닌 상선 선원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16살 여름방학 때 지방의회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주당 7파운드를 번 게 그가 합법적으로 돈을 번 첫 경험이었다.(텔레그래프, 2016.4.11) 64년 그는 마을 학교(Garw grammer school) 출신으론 처음으로 명문 옥스퍼드대 발리올(Balliol) 칼리지(물리학 전공)에 입학했다. 그 무렵 대학가에는 이미 다양한 마약들이 퍼져 있었고 보수적인 옥스퍼드대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1학년 때 이미 온갖 종류의 약을 경험했던 듯하다. 2학년이던 65년 기숙사 친구 조슈아 맥밀런(전 총리 해럴드 맥밀런의 아들)이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지는 걸 본 뒤 그는 하드 드럭을 끊었다. 67년 졸업 후 런던대와 발리올칼리지, 서섹스대로 적을 옮겨가며 과학철학으로 70년 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원 진학 전 교직과정을 이수하던 무렵 라트비아 출신 옥스퍼드 세인트앤느칼리지 졸업생 일저 커데지스(Ilze Kadegis)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둘이 금세 이혼한 건 막스가 마약 거래에 손은 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2013년 ‘Fame & Fortune’ 인터뷰에서 “돈이 (마약상이 된)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지만, 주요 동기였던 건 맞다”고, “널리 선호되는 믿음은 아닐 테지만, 나는 돈이 행복을 키워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른 동기이자 명분은 물론 그 시절 청년 히피문화와 그의 이상주의였다. 2013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그는 “(마리화나 거래를) 평화와 사랑을 전파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리화나가 금세 합법화될 것이라 여겼고, 그 전에 그걸로 돈이나 잔뜩 벌어두자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1996년 그의 자서전 ‘미스터 나이스’의 내용은 위키피디아에 요약돼 있다. 막스는 처음부터 소매상이 아니라 무역상이었다. 필리핀 홍콩 등 아시아와 남미, 중동 등 산지와 유럽과 북미 소비시장을 잇는 국제 네트워크의 작은 고리로 시작해 두 대륙 최대 공급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극적이다. 시장 안팎에서, 시시때때로 겪었을 거칠고 위험한 상황들을 총도 주먹도 조직도 없이 혼자 헤쳐 나온 데는 그의 학력과 동창 인맥, 유연한 화법과 매너 등이 유기적으로 기여했을 테지만, 거꾸로 시장의 주역들과 다르다는 점은 신뢰를 쌓는 데 불리하기도 했을 것이다. 막스는 상충되는 이해를 조정하는 데서 오는 ‘문화적 스릴’을 즐겼고, 폭력이 아니라 신사적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악수를 나눌 수 있는” 거래를 사랑했다고 말했다.(가디언, 2013.5.27)

음악 페스티벌 시즌에 맞춰 공연팀을 가장해 국경을 넘나들기도 했고, 정보기관 동문 네트워크를 방패로 활용하기도 했다. 영국 외교부 비밀정보부(MI6)와 미국 중앙정보부(CIA) 등은 막스의 마리화나 커넥션을 IRA(아일랜드공화국군)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정보활동에 실제로 이용했다.

실형을 살고 1995년 빈털터리로 풀려난 그는 이듬해 자서전 ‘Mr. Nice’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우선은 돈이 필요해서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홈페이지.
실형을 살고 1995년 빈털터리로 풀려난 그는 이듬해 자서전 ‘Mr. Nice’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우선은 돈이 필요해서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신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홈페이지.

전성기의 그는 한 해 평균 수백만 파운드씩 벌어들였다고 했다. “태국에서 캐나다로 한 번에 30톤을 보낸 적도 있었다. 약 6,000만~7,000만 파운드어치였다. 하지만 모든 거래는 복잡한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기 때문에 내 몫이 딱 얼마라고 정하는 건 어렵다. 그 거래로 내가 번 건 약 70만 파운드였다.” 그가 살아남은 가장 주요한 비결은 어쩌면, 돈에 목숨 걸만큼 악착스럽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디다 쓸지 모를 만큼 많은 현금을 종이박스에 담아두고 지내면서 투자 명목으로 손 벌리는 이들에게 나눠도 주고, 노숙자단체나 마약재활시설에 기부도 했다고 한다. 돈세탁도 어렵지 않아 가방에 현금 100만 달러를 지니고 홍콩 공항에 입국한 적도 있었다지만, 그는 노후를 위해 스위스은행 같은 곳을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 여겨서가 아니라 내일이 무의미하다고 여긴 까닭이었던 듯하다. “6년 반 동안 도망자로 살면서도 마리화나 거래를 중단한 적은 없었다. 그게 내 운명, 내 카르마라 여겼다. KO를 당해 링에 드러누울 때까지 싸워야 하는 프로복서 같았다.”(가디언, 2016.4.11) 3년 전 5월 인터뷰에서는 “그래도 법 때문에 불안해서 잠 못 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도 했다. 당시 그는 43개의 위장 신분증과 기억도 못할 89개 전화번호, 세계 각지의 25개 유령회사를 혼자 운영했다. ‘나이스’는 그가 썼던 여권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73년 네덜란드 세관당국에 체포된 막스는 MI6 요원이던 대학 동창 해밀턴 맥밀런(Hamilton McMillan)이란 이의 이름을 방패 삼았다. IRA 마약 소탕작전에 투입된 위장요원으로 해명해 본국으로 송환된 그는 보석금 2만 파운드를 내고 풀려났다. 어쨌건 맥밀런을 도운 건 사실이었고, 재판까지 몰고 가기엔 MI6가 잃을 게 많았다. 1980년 다시 체포됐을 땐 런던 중앙형사재판소(Old Bailey)에 서야 했지만 그는 다시 MI6 카드를 내밀었고, 멕시코 반테러 작전 등에 협력했다는 정황과 증언으로 또 풀려났다. 가디언은 그의 부고에서, 재판 중 한 배심원이 그의 매력에 사로잡힌 게 명백해 보였다고 썼다.

그 해 주디 레인(Judy Lane)과 재혼한 그는 재판 후 손을 털고 스페인 마요르카로 이주했다. 하지만 영화배우 리스 이판(Rhys Ifans)이 그를 연기한 2010년 영화 ‘Mr Nice’에 묘사된 것처럼, 막스는 “영원할 것 같은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 좋은 와인과 나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했다.

1988년 그는 아내 레인과 함께 미국 마약단속국(DEA)에 체포됐다. 필리핀에 거점을 둔 한 동업자가 그를 팔아 양형거래를 했고, 증언과 녹음파일 등 증거 자료를 넘겼다. 검찰은 플로리다로 강제 송환된 그에게도 양형거래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했고, 25년형을 선고 받은 뒤 미국의 6대 중죄인형무소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다는 인디애나 주 테러호트(Terre Haute)에 수감됐다. 그의 ‘의리’는 감옥에서, 한때 동업자였거나 동업자의 부하들에 의해 보상 받았다. 옥중에서 그는 마피아와 코르시카 출신의 프렌치 커넥션 멤버들을 모아놓고 자잘한 법률 교육서부터 영어 교육, 철학강좌 등을 운영했다고 한다.

‘나르코 폴로’는, 은어사전 ‘urban dictionary’에 따르면 마약 단속활동을 통칭하는 말이다. 멕시코 마약 대부 에드가 발데스 빌라리얼이 2011년 체포 당시 입었던 폴로 티셔츠(빅 포니) 로고에서 파생돼 마약상 일반을 뜻하는 은어라는 설(nbc news)도 있다. 하지만 유럽의 언론들은 막스가 원조라고, 박식한 마리화나 신사 막스를 간수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썼다. 그는 7년 뒤인 95년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그는 가난한 말년을 보냈지만 후회 없다고, 끝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홈페이지.
그는 가난한 말년을 보냈지만 후회 없다고, 끝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의 홈페이지.

그가 출옥한 90년대 중반은 합성마약 ‘엑스터시’의 시대였다. 엑스터시에 대해 그는 “거기 뭐가 들었는지 알게 뭐냐(…) 그건 오염된 마약”이라며 못마땅해했다. 빈털터리가 된 막스는 96년 자서전 <Mr. Nice>를 출간했다.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그의 책은 논픽션 베스트셀러로 약 100만 부가 팔렸다. <하워드 막스의 마약 이야기 The Howard Marks Book of Dope Stories(2001)>와 자서전 후편인 <웨일즈에서 남미까지, 세뇨르 나이스의 일생 Senor Nice: Straight Life from Wales to South America(2006)> 을 잇달아냈고, 범죄 소설 <악마를 위한 연민 Sympathy for the Devil(2010)>과 여형사가 주인공이라는 <더 스코어 The Score(2013)>를 썼다. 그는 버나드 로즈 감독에게 영화 ‘Mr. Nice’(2010)를 판권 인세 없이 찍게 했다. 인기 뮤직 밴드 ‘Alabama3’와 ‘Super Furry Animals’ 등은 그의 헌정음반을 내거나 공연 게스트로 그를 초대하곤 했다.

막스 자신도 강연과 칼럼, 방송, 원맨쇼 공연 등을 활발히 벌였다. 화려한 재담과 함께 그가 줄기차게 제기한 메시지는 마리화나 합법화였다. 97년 하원선거에도 출마해 1%를 득표했는데, 당시의 공약도 딱 하나 ‘마리화나 합법화’였다.

공식 홈페이지에 실린 막스의 이력에는 그가 자서전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을 “마리화나 불법화에 대한 불만의 표출”로 이해했다고 적혀 있다. “나는 여전히 낙관하고 있고, 기다리고 있다. 그 수많은 히피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헛소리를 지껄인 게 아님을 우리는 증명할 수 있다.” 2015년 BBC 인터뷰에서 그는 “마약을 범죄사회에 맡겨두는 대신 합법화해서 통제한다면 우리 사회는 오히려 더 안전해질 거다. 그건 정부의 선택인데, 지금처럼 내버려두는 건 정부가 이 상황을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어떤 마약이 당신에게 살인이나 강간 충동을 일으킨다면 그건 명백히 불법화해야 한다. 나는 세상 모든 마약은 아니어도 아주 많은 것들을 경험했지만, 그 무엇으로도 그런 충동을 겪은 적이 없다. 단 하나 예외라면 알코올이 있는데, 그건 또 유일한 합법 약물이다. 난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물론 그가 딱딱한 얘기만 한 건 아니었다. Fame & Fortune 인터뷰에서 ‘범죄가 수지맞는 장사더냐’는 질문에 그는 “물론이다. 하지만 내 전철을 밟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벽돌을 한 장 들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집어 던진 뒤 어떻게 되는지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 이혼한 뒤 리즈(Leeds)로 이사했다. 그 무렵 주 수입원은 6개월마다 입금되는 인세가 거의 전부였다. 2013년 인터뷰에서 막스는 “아주 실망스러운 액수지만, 내 목숨이 이제 인세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말년의 그는 침실 하나짜리 플랫에 혼자 살며, 지인이 운영하는 바에 자신의 사진과 기념품 등을 전시하도록 하는 조건으로 술과 음식을 무제한 제공받았다. 지난 해 가을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잇달아 찾아온 기자들에게 “늘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다만 전처와 딸들에게 슬픔을 안긴 건 미안하다”고 말했다.

수많은 이들이 막스의 죽음을 애도했다. 배우 키스 앨런처럼 “그는 대영제국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아야 했다”고 말한 이들도 있었고, “그의 말년은 평가 받을 만하지만 마약시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범죄들을 감안해 지나친 미화는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 이도 있었다.

마리화나 합법화에 대한 영국의 여론은 여전히 엇갈리지만, 변화의 추세는 그의 편인 듯하다. 공개적으로 합법화를 지지한 정치인도 적지 않고, ‘스팅’ 같은 예술인들도 그를 편들었다. 지난해 영국 자유당 당권 경선에 출마했던 전 보건부장관 노먼 램(Norman Lamb)은 “마리화나를 합법화해 올바르게 관리감독 한다면 범죄집단의 자금줄을 끊을 수 있고, 사회적으로나 보건 면에서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막스가 20년 전부터 말과 글로, 아니 생애를 바쳐 몸으로 역설한 바였다. 그가 행복했다면, 끝내 낙관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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