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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정적(靜寂)] 연민(憐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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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정적(靜寂)] 연민(憐憫)

입력
2018.05.07 13:5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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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하는 인간은 숙고(熟考)와 연민(憐憫)을 연습한다. 숙고는 어제의 나의 생각을 버리고, 지금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전략을 떠올리는 수련이다. 그런 생각엔 인내가 필요하다. 금방 결론을 내리려는 내 자신을 절제하고, 어제보다 더 깊고 넓은 생각을 떠올리기를 훈련한다. 숙고는 어떤 사람도 가본 적이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발견된 보물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흠모한다. 숙고는 자연스럽게 연민으로 이어진다. 나는 우주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부모, 형제, 일가친척, 그리고 국가의 일원이다. 나라는 1인칭은 너라는 2인칭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나와 너, 그리고 나와 3인칭인 그것이 하나로 묶어진 것이 우리다. 우리는 분리된 주체들이 안 보이는 끈으로 엮인 공동체다. 그 끈이 바로 연민이다. 숙고와 연민을 통해 정제된 나의 결단은 스스로를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적이라도 감동시킨다.

서양정신의 정수를 담은 책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기록된 최초의 책이다. 기원전 7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실제로 일리아스 제1권의 첫 단어가 고대 그리스어로 ‘메닌(menin)’인데, 그 의미가 분노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그리스 연합군의 총 지휘자 아가멤논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아킬레우스가 화가 치밀었다. 그의 분노는 일리아스 22권에 절정에 이른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 왕자 헥토르에게 살해당하자 분노가 극에 달한다. 그는 트로이 성벽 앞에서 헥토르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그를 무참히 살해한 후, 그 시신을 전차에 묶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온다. 아킬레우스는 명성을 얻기 위해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였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비극적인 분노뿐이다.

일리아스의 주제가 분노일 뿐인가? 또 다른 주인공은 헥토르의 아버지이면서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다. 그는 트로이 성벽 위에서 아들 헥토르가 처참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애통해 하며 일리아스 22권에서 말한다. “헥토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자식! 슬픔의 쓰라림이 나를 지옥으로 끌어내리는구나! 네가 내 팔에서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너를 낳은 불행한 어머니(헤쿠바)와 나는 너를 위해 울고 슬퍼하는 수밖에 없구나!”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인 제24권에서 ‘누가 진정한 리더인가’를 소개한다. 한 명은 프리아모스이고, 다른 한 명은 분노에 찬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연민에 찬 아킬레우스다. 프리아모스는 자기 아들의 시신이 아킬레우스가 머무는 적진 텐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단한다. 그는 만신창이가 된 헥토르의 시신을 수습하여 트로이 성안에서 성대한 장례를 치를 것이다. 그는 홀로 분연히 자신의 목숨을 걸고 트로이 성을 떠나 아킬레우스 텐트로 들어간다. 마침 아킬레우스는 두 명의 영웅들과 함께 식사를 막 마칠 참이었다. 그 극적인 순간을 호메로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위대한(그리스어 메가스(megas)) 프리아모스는 그들 몰래 텐트 안으로 가까이 다가가 두 손으로 아킬레우스의 무릎을 잡고 자기 아들들을 수없이 죽인, 남자를 죽이는 그 무시무시한 손에 입 맞추었다.” 호메로스는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세상의 최고 권력인 왕의 지위도 내려놓고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은 프리아모스가 ‘위대하다’고 묘사한다. 그는 아들의 장례를 위해 시신을 가져가려는, 왕이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위대함’을 발현한다.

프리아모스는 그 무시무시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킬레우스에게 말한다. “신과 같은(그리스어 테오이데아(theoidea)) 아킬레우스여,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처럼 늙었고 슬픈 노령의 문턱에 서 있는 그대 아버지를. 혹시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그분을 괴롭히더라도 그분을 파멸과 재앙에서 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오. 그래도 그분은 그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날이면 날마다 사랑하는 아들이 트로이에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을 것이오.”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신과 같다’고 묘사한다.

프리아모스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신의 목숨보다 고귀하고, 아킬레우스의 칼보다 강력하다. 이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엔 경계나 터부가 없다. 이렇게 말을 하자 아킬레우스의 마음속에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났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서로 부둥켜안고 전쟁에서 죽어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울기 시작한다.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찬양하면서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의 적인 프리아모스를 ‘신과 같이’ 보고 그를 위해 우는 영웅으로 묘사한다. 호메로스는 이 위대한 서사시를 통해 원수를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인 연민을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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