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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6> 카트린느 데스티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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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26> 카트린느 데스티벨

입력
2006.08.23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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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20여년 전 대학 졸업반 시절이었다. 우연히 들른 학과 사무실에는 방금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선배가 무심코 던져둔 프랑스 산악 전문지가 한 권 놓여 있었다. 명색이 불문학도였을 뿐 불어에는 거의 까막눈에 가까웠던 내게 그 잡지는 화보집에 불과했다.

카트린느 데스티벨(46)은 그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잡지 안에 접힌 상태로 끼워있던 대형 포스터의 주인공 역시 그녀였다. 물론 거대한 암벽에 붙어있는 멋진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실제의 산악인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눈이 부실만큼 빼어난 미모와 완벽한 몸매를 갖춘 그녀의 사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정말 프랑스는 하다못해 산악잡지에서조차 모델들만큼은 끝내주는 여자를 쓰는군.

카트린느 데스티벨은 한 동안 내가 그리던 ‘꿈 속의 연인’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가 ‘모델’이 아니라 ‘산악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사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바위에 매달린 그녀의 모습을 담은 각종 사진들은 언제나 내 책상 앞의 액자와 집필실의 유리창과 컴퓨터의 바탕화면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만의 독특한 취향만도 아니었다. 1980년대 후반 전세계의 등반장비점에서는 언제나 그녀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들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프랑스인들이 ‘알프스의 요정’이라고 칭송하는 절세의 미인 카트린느 데스티벨. 그녀는 과연 등반을 잘해서 유명해진 걸까 아니면 미인이기 때문에 사랑 받고 있는 것일까?

프랑스에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스포츠 스타가 두 명 있다. 하나는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이고, 다른 하나는 클라이머 카트린느 데스티벨이다. 카트린느가 클라이밍에 몰입하게 된 것은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 숲에서였다. 다복한 5남매를 둔 그의 부모들은 휴일마다 이곳으로 가족 소풍을 나오곤 했는데, 숲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볼더링(bouldering) 바위들이 어린 소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매혹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열 살도 되기 전에 바위에 매달려 깔깔댔고, 열 네 살이 되었을 때에는 또래의 그 어떤 사내아이들보다 뛰어난 볼더링 솜씨를 뽐내게 되었다.

볼더링을 즐기던 소녀는 보다 높은 바위를 찾아 나서기 마련이다. 카트린느는 18살이 되기 전에 프랑스의 베르동, 이태리의 돌로미티, 벨기에의 프라일 등지에 널려 있는 고전적인 암벽 루트들을 대부분 마스터했다. 19살 때는 영국 웨일즈의 전설적인 루트들인 보이드와 시타델 등을 올랐는데 이는 당시까지 그 어떤 영국의 여성 클라이머들도 선등하지 못했던 곳이다. 카트린느의 등반은 보수적인 영국 남성 산악인들의 고정관념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지껏 그들이 ‘훌륭한 여성 클라이머’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곧 ‘징징대지 않고 남자의 뒤를 따라올 수 있는 여자’ 정도를 의미했던 것이다. 하지만 카트린느는 보란 듯이 저 홀로 그 무시무시한 루트를 선등해서 올라갔다. 그것도 시종일관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즐겁잖아요?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고.” 언제나 그렇게 웃으며 등반하느냐고 누군가가 묻자 카트린느는 그렇게 대답했다. “등반할 때 저는 언제나 어린 시절의 퐁텐블로 숲을 생각해요. 너무 행복했던 시절이었죠. 이제는 볼더링 바위가 거벽이 되고, 제가 어른이 되었을 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카트린느가 심지어 여성 산악인들로부터도 시새움과 질투의 시선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이 대목 어딘가쯤 일 것이다.

놀라운 등반능력, 빼어난 미모, 완벽한 몸매, 거기다가 매혹적인 미소까지 갖추었으니 얄밉게 보일 만도 하다. 아울러 광고와 영화 등 각종 영상매체에서 그녀를 섭외하기 위하여 앞 다투어 몰려든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986년이 되자 그녀는 여성 하키팀의 물리치료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전업 등반가로 나선다. 그리고 이후 3년 동안 세계 전역의 각종 암벽대회에서 숱한 우승기록을 세운다. 카트린느의 아름다운 모습이 전세계의 산악 잡지들과 각종 포스터들을 도배하다시피 한 것은 이 즈음이다.

하지만 1989년이 되자 그녀는 돌연 각종 매스컴의 카메라 앞에서 종적을 감춘다. 왜 그랬을까? “어느 날 문득 내가 누군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없고,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만이 존재하는 듯한 어떤 상실감 같은 것에 시달렸죠. 나는 내게 주어진 이미지 너머로 올라서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그녀에게 원했던 것은 ‘등반 장비가 잘 어울리는 예쁜 여자 모델’이었을지도 모른다. 카트린느는 이제 그들이 원하는 ‘등반계의 바비인형’으로 남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대변신에 가장 든든한 지원군으로 참여해준 사람은 미국의 거벽 등반가 제프 로우였다. 그녀는 제프 로우와 함께 파키스탄 트랑고의 네임리스타워를 자유등반으로 올라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1990년 가을, 그녀는 일찍이 월터 보나티가 5일 간의 사투 끝에 새 길을 냈던 ‘보나티 필라’에 단독으로 도전한다. 당시 그녀가 자유등반으로 이 루트를 돌파해내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4시간 20분이다. 전세계의 남성 등반가들이 입을 쩍 벌렸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은근한 비아냥 혹은 폄하도 잇따랐다.

“35년 전에 개척된 기존 루트를 속도등반으로 올랐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가?” 이게 무슨 뜻인가? 이제야 비로소 남성 등반가들이 그녀를 ‘대등한 상대 혹은 적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제 더 이상 바비인형이기를 거부한 카트린느는 그러나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이렇게 맞받아쳤다. “나도 더 이상 카피본으로 남고 싶지는 않아요. 내 자신이 원본이라는 것을 보여드리죠. 나는 프티 드뤼에 나만의 루트를 개척해서 올라갈 겁니다.”

홀로 프티 드뤼 개척등반 세계 놀라게

'여성' '예쁜' 수식어 불식… "우리는 모두 클라이머일 뿐"

1991년의 세계 등반사에서 단 하나의 ‘사건’을 꼽으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카트린느 데스티벨의 프티 드뤼 개척 등반이다. 당시 그녀가 개척 등반을 선언했을 때 그 성공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프티 드뤼라는 대상 자체에 더 이상의 개척 가능성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여지껏 알프스의 거벽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여성 산악인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카트린느가 홀로 이 벽에 9일 동안 매달려 있을 때 가지고 올라간 장비목록을 보면 가슴이 싸해진다. 5㎜ 로프 80m, 10㎜ 로프 40m, 프렌드 3세트, 피톤 2세트, 하켄 30개, 포타렛지, 10일치 식량. 예쁜 바비 인형은 간 데 없고 다만 목숨을 내건 산악인만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웃으며 덧붙인다. “무겁겠지만 미셀 투르니에의 소설 한 권도 챙겼죠. 그 벽에 붙어 있으면 너무 고독하고 무서울 테니까요.”

끝내 자신만의 새로운 루트로 프티 드뤼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그녀는 한 없이 울었다. 그 고운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의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 아름다웠던 육체는 뒤틀린 장작개비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그녀의 이름 앞에 ‘여성’이나 ‘예쁜’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못한다. 카트린느는 일그러진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클라이머에요, 그뿐이죠.”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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