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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언주와 이장한의 사적 공간

입력
2017.07.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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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녹취록이 발화 당사자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그 하나는 이언주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가 SBS 기자와의 통화에서 학교 비정규직을 “밥하는 아줌마” “미친 X”라고 비하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욕설 소나기를 퍼부은 것이다. 이런 내용이 보도된 후 이 부대표는 공개 사과 자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부터 “의원 사퇴하라”는 거센 항의에 직면했고, 이 회장은 수사 대상이 됐다. 둘 다 거침없는 대화가 폭로된 결과이나, 그 폭로의 양상은 좀 다르다.

이 부대표의 막말에 국민의당은 “기자가 사적 대화를 몰래 녹음해 보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입법기관, 정책입안자로서 문제가 될 인식이었는데도, 기자를 기레기 삼아 비난의 화살을 피하려 한 것이다. 김동철 원내대표는 “언론이 방송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정권 눈치를 본 것”이라는 음모론적 발언마저 했다. 한마디로 터무니없다. 추가로 공개된 녹취록을 보면 해당 기자는 “학교 비정규직 파업에 대해 입장을 묻고 싶다”는 취재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기본적으로 정당 보직자와 기자의 통화가,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공적 업무인 것은 정치인들이 더 잘 안다. 기자가 사적 목적으로 통화를 한다면 그게 더 문제일 터다.

이에 비하면 민간기업 창업자 2세인 이 회장의 폭언 대화는 사적인 면이 없지 않다. 운전도 회사 업무지만 두 사람만 있었던 개인 차량 안에서의 대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경찰이 모욕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한 것도 모욕죄는 다중 앞에서 사람을 모욕한 데 대해 처벌하는 죄목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니 폭행죄로 처벌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것은 최근 수년 새 ‘재벌가 갑질’에 대한 분노 게이지가 높아진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이드 미러 접고 운전하기’ 등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의 기상천외한 운전기사 괴롭힘부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에 이르기까지 상상가능한 온갖 갑질이 언론에 폭로되고 분노를 자극했다.

그러나, ‘갑질 응징’의 트렌드와 함께 확산되는 녹취와 폭로, 그에 대한 공분이 나는 때로 불편하다. 그 공분의 에너지 상당 부분이 갑질을 개선하는 공익에 봉사하기보다, 갑을 비난하는 것 자체의 카타르시스로 소모되는 탓이다. ‘땅콩 회항’에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이 내려진 것은 승객 안전을 위해 승무원을 보호하는 법규에 따른 것이지, 재벌가의 갑질을 엄단하는 법규가 있는 게 아니다. 회장님, 상무님들의 저질 품성을 형사 처벌로 응징하겠다는 욕구는 법치를 넘어선 도덕주의다. 거꾸로, 직원들에게 친절한 기업이 꼭 공익적인 것도 아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고도, 매출 신장에 대한 포상으로 직원들을 해외여행 보내준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가 그런 사례다.

외면할 수 없는 또 한가지는 사적 영역을 어디까지 폭로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과거 사생활 보호권이 공익제보자만 처벌하는 칼로 종종 악용된 것이 사실이지만, 스마트폰 시대에 녹취는 쉽고 폭로는 빠르다.

사회적 공분의 힘으로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전근대적 ‘갑질의 사회’를 인터넷 기반의 ‘폭로의 사회’로 대체할 필요는 없다. 갑질 분노를 특정 재벌 2세, 3세 표적에 집중하기보다, 지금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듯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주의 불평등한 계약관계를 개선하는 그런 노력이 절실하다. 근대적 계약의 공정성을 정립하고 부당한 대우에 항의와 구제의 길을 제도화하는 일이다. 그쯤 되면 갑들도 녹취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니 좋지 않을까.

김희원 기획취재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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