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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성은 희망이다

입력
2016.02.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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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개성공단을 군사통제구역으로 선포하고 남측 인원 전원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한 다음날인 12일 오전, 안개 자욱한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의 모습이 적막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북한이 개성공단을 군사통제구역으로 선포하고 남측 인원 전원을 추방하는 조치를 취한 다음날인 12일 오전, 안개 자욱한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의 모습이 적막하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개성을 처음 가 봤던 게 꼭 13년 전이다. 당시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맡고 있던 나는 2003년 2월 하순에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 역사학자간 공동학술대회 취재를 하게 되었다. 김대중정부에 이어 노무현정부 출범으로 한반도에 화해 무드가 번지던 때였고, 그 훈풍을 타고 이런 남북간 교류 행사도 조금씩 늘고 있었다.

학술대회에선 ‘일제의 조선 강점 불법성’을 주제로 한 토론과 자료 전시가 예정돼 있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남북 학자들이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기 제일 편한 주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피해 발표 및 일본 규탄이고, 또 하나는 유적 조사ㆍ발굴이다. 내게는 그때 학술행사가 조금은 각별했다. 대개 이런 유형의 남북 행사에는 적어도 남쪽에서는 원하는 기자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소 둘 이상 복수의 기자가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학술대회의 공동주최자로 한국일보가 이름을 올리고 행사를 단독 취재하게 되었던 거다. 능력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넝쿨째 굴러온 ‘특종’이지만 기자로서는 살짝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취재였다.

게다가 열흘 남짓 일정은 평양의 행사 취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평양 시내를 둘러보고 묘향산을 다녀오고 개성까지 가 보는 스케줄이었다. 묘향산은 김일성, 김정일이 외국 수반이나 사절에게서 받은 선물을 모아 놓은 국제친선박람관을 방문하는 것이어서 체제 선전인가보다 했지만 개성은 달랐다. 고려 유적을 둘러보려는 것이었고, 그때가 마침 서울에서 자동차로 40분이면 도착하는 이 북녘 같지 않은 북녘 땅에 분단 이후 남북 최초의 본격적인 경제협력사업인 개성공단 사업의 시동이 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단체버스로 평양을 출발해 텅 빈 도로를 두 시간(!) 달려 개성에 도착했다. 한창 터 닦기 중인 개성공단 부지를 본 뒤 박연폭포, 고려 궁궐터 만월대, 왕건왕릉, 공민왕릉, 선죽교, 영통사, 고려박물관을 찾아갔다. 3년 뒤 시작된 개성관광 코스를 미리 맛 본 것이었다.

개성은 평양처럼 화강암과 시멘트로 우뚝하게 지어 올린 건축물이나 널찍한 도로가 없어서 그랬을까. 남북협력의 씨앗이 뿌려지는 데다 “만월대 아래 동네서 태어났다”는 남쪽 일행 중 한 분의 감회에 함께 젖었던 걸까. 개성은 평양과 달랐다. 이념으로 박제된 차가운 도시가 아니었다. 천천히 달리는 버스를 향해 손 흔들어 주는 개성 사람들을 차창 밖으로 마주하며 가슴이 뭉클했다. 평양에 더 여러 날을 머물렀지만 본 적 없는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직감한 게 있었다. 만약 통일의 기운이 움튼다면 그건 개성에서일 거라고.

그러나 그 뒤 궤도에 오른 개성공단사업과 관광은 과거사가 되고 말았다. 개성 관광은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이후 이명박정부의 5ㆍ24 조치로 중단되었다. 2004년 가동한 개성공단은 3년 전 한미군사훈련에 반발한 북한이 잠정 중단하면서 몇 달 멈췄다가 이번에는 북한의 핵 실험 등을 이유로 박근혜정부가 중단을 결정하고 북한이 폐쇄로 맞대응하면서 문을 닫아 걸게 되었다.

정부의 이번 가동 중단 결정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인 돈을 핵ㆍ미사일 개발에 쓴다는 증거를 정부가 보여준다면 이 조치를 납득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를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가 솔선해서 북한을 압박해야 한다는 논리였다면, 외교력을 발휘해 영향력 있는 중국이 적극적인 대북 제재에 나서도록 하고 그로 인해 북한의 핵ㆍ미사일 개발에 실제로 제동이 걸리는 실소득대(失小得大)의 효과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도 저도 아니라면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통일 대박’이라는 섣부른 구호보다 남북이 실질적인 협력사업을 넓혀가며 차근차근 통일로 나아가기 바랐던 많은 사람들에게 더 할 수 없는 절망만 안겨주는 조치로 끝나고 말 것이다.

김범수 문화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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