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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도 우연도 생길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호암상 수상자의 ‘우연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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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도 우연도 생길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호암상 수상자의 ‘우연학’ 개론

입력
2017.06.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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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창업한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제정된 ‘호암상’은 순금 메달과 함께 무려 3억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그만큼 심사기준도 까다롭다. 수상 부문별로 뛰어난 업적과 함께 사회공익에도 기여해야 한다. 올해 시상식에서는 국내외 전문가 30여 명의 깐깐한 심사를 통과한 5명(1곳은 단체)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들의 수상소감에서는 그 동안의 노력과 고민,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진심이 묻어 나왔다.

과학상 수상자 최수경(60) 경상대 교수

1일 오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최수경 경상대 교수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스1
1일 오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최수경 경상대 교수가 수상 소감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제가 연구하는 것은 경제성이 있는 분야가 아닙니다. 3년 넘게 준비했던 연구과제의 연구비 수주도 모두 실패했습니다. 주당 9시간의 강의와 기타 여러 업무 등으로 연구에만 전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이제 그만 할까’ 생각하던 시기에 수상 통보를 받았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건이라 연구를 계속하라는 계시인지, 내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화분에 키우고 있는 아끼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 잎들이 창에 그림자를 만들면 그걸 쳐다보면서 잠이 드는 게 좋았습니다. 몇 년 전 여름이 끝날 무렵 나무를 여러 개 만들기 위해 꺾꽂이를 처음 해봤습니다. 잎이 다섯 개 달린 작은 가지를 꺾어 물에 담가 놓았는데 정말 뿌리가 나기 시작해 화분에 옮겨 심었습니다.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다섯 잎 그 상태로 2년 반이 더 지났습니다. 그러다 잎들이 하나 둘 시들며 떨어졌습니다. ‘이제 이 나무는 죽는구나, 꺾꽂이가 쉬운 게 아니구나’ 생각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며칠 뒤 새 잎이 몇 군데에서 동시에 틔기 시작해 어느새 잎이 열 다섯 개가 됐습니다.

이 화분을 볼 때마다 그 때의 마음 고생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연구도 이와 비슷합니다. 몇 년 혹은 더 오랫동안 매우 지루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잎들이 새로 돋아나기도 합니다. 가끔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크게 계획한 일이 평범하게 될 때도 많고, 또 그 반대의 일도 가끔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지루한 과정이,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단순하게 일에 몰두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미 연구에 몰두하는 것 그 자체로 보상을 받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최 교수는 기존 입자들과 성질이 전혀 다른 X, Y, Z 입자를 최초로 발견해 입자물리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 공로로 과학상 수상)

의학상 수상자 백순명(60) 연세대 교수

1일 오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백순명 연세대 교수가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1일 오후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백순명 연세대 교수가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모국에 돌아온 이후 연구가 아닌 20년 전 미국에서 진행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상을 수상하게 돼 매우 부끄럽습니다. 제 친구인 조지타운대학 안톤 웰스타인 교수는 “연구자는 가장 최근 발표한 논문으로 평가 받는다"고 하는데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가 최근 귀국해 이룬 성과물들은 매우 부족합니다. 정년까지 5년 밖에 안 남았지만 좀더 연구에 전념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하거나 뛰어난 특기가 없는 제가 환자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무수히 많은 선생님들과 선후배, 동료들에게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제가 이 기회에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은 저의 성과는 개인의 발명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연구자가 협력한 융합 연구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제 스승이신 닥터 피셔(Fisher) 형제가 50년에 걸쳐 진행한 임상시험과 참여 환자로부터 증여받아 어렵게 구축한 암 조직 은행, 15만명이 넘는 임상시험자, 환자의 추적조사를 진행한 700개 병원과 거기에 속한 3000명의 의사 및 연구진, 통계학자 등등 모두 같이 유방암 환자를 돕겠다는 일념으로 협력해 만든 숭고한 연구 결과입니다.

제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었고, 전 지독히 운이 좋은 연구자일 뿐입니다. 다만 한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모교에 돌아와 연구하며 느낀 점은 한국에서는 연구자간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의견 교환이 적고, 국가에서 너무 톱다운(top-down) 방식의 연구비 정책을 고수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우연’의 기회가 미국보다 훨씬 적게 발생합니다. 결국 우연이란 것도, 우연이 생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가능합니다.”

(백 교수는 ‘온코타입 DX(Oncotype DX)'란 유방암 유전자 검사법을 개발해 항생제 남용 없이 개인별 맞춤 치료의 기반을 마련한 공로로 의학상 수상)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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