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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기자

등록 : 2018.02.14 16:53
수정 : 2018.02.14 19:21

기계에 절하던 한솔 노동자, 설 선물 받다

한솔페이퍼텍 파업 65일 마무리

등록 : 2018.02.14 16:53
수정 : 2018.02.14 19:21

입사 10년차에야 최저임금 수준

독후감 강요 등 반인권적 조직문화

기계에 고개 숙이는 직원까지

靑ㆍ국회 찾고 길거리 시민에 홍보

꿈쩍않던 회사와 마침내 교섭

“비슷한 처우 노동자에 희망이…”

총파업 64일만인 11일 한솔페이퍼텍 노동조합원들이 한솔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한 건물 앞에서 결의대회를 갖고 있다.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한솔페이퍼텍지회 제공

강추위가 온몸을 에워싼 8일, 서울 중구 을지로 한 대형빌딩 앞 인도에 푸른색 천막이 세워졌다.

전남 담양군 소재 골판지 생산업체 한솔페이퍼텍㈜ 노동조합원들이 최저임금 쟁취를 위한 ‘마지막 승부수’라며 차린 상경투쟁 기지다.

이날 노조원 약 30명을 이끌고 서울 땅을 밟은 서민호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한솔페이퍼텍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너무 착하게, 아니 비겁하게 살아왔노라며 “해볼 데까지 해보겠다”는 심경으로 상경했다고 했다. “가족에게 부끄러워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총파업을 선언한 지 59일만이었다.

노조에 따르면 지금까지 이들의 노동 여건은 심각하다 못해 처참했다( 본보 1일자 30면 참고 ). 신분은 엄연한 대기업(한솔그룹) 계열사 정규직 노동자지만,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려 왔다. 지난해만 해도 신입사원 시급은 5,856원. 입사 10년 차나 돼야 그 해 최저임금(6,470원)에 18원 넘어서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일주일에 하루씩 쉬어가며 월 120시간이 넘는 초과근무를 요구 받을 때도 있지만, 그래야만 가족이 ‘입에 풀칠할 만큼’의 월급을 거머쥘 수 있었단다. 지인들에 처우를 말하면 “대기업 계열사가 설마 그 정도겠냐”라며 믿지 않았다.

더 참기 힘들었던 건 반인권적 조직문화. 회사는 분임조별로 기계에 감사 표어를 직접 지어 붙이도록 하면서 긍정 마인드를 심어주는 내용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내라고 강요했다. 한 조합원은 “현실에서 얻은 고통을 책으로 잊으라는 듯한 최면 같았다”라며 “기계한테 고개 숙이는 직원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여건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고자 청와대 앞과 국회 정론관을 찾아 기자회견을 하고, 지역에서도 열심히 선전활동을 했지만, 무(無)노조 경영을 원칙으로 삼던 사측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들은 “설 연휴 전엔 성과를 안고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실태를 알릴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사측은 그제서야 단체협약 및 임금협약에 대한 ‘집중교섭’을 제안해 왔다. 노조를 인정 않던 사측이 처음으로 대화를 요청했다. 9일 담양에선 교섭이 시작됐고, 서울에선 상경투쟁이 본격 진행됐다. 이들은 새벽 출근길부터 지하철 을지로3가역을 나서는 시민에게 부당노동 실태를 알리는 전단을 나눠주고,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엔 본사 직원들 보란 듯 결의대회를 가졌다. 그들에 말 한 번 걸어주는 본사 직원은 한 명도 없었고, 시민들도 열에 한 명 정도나 전단을 받아줬지만 그들은 담담히 처우를 알렸다.

교섭 끝에 이들은 파업 65일만인 12일 원하던 결과를 얻어냈다. 신입사원 시급을 올해 최저임금 수준인 7,530원으로 끌어올리고, 3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상여금도 현실화했다. 노조원들이 꼽은 가장 큰 성과는 한솔의 무노조경영 원칙 철회다. 부당한 처우를 받아가면서도 맞서지 못했던 이들은, 당당히 노동권을 요구할 수 있는 지위를 쟁취했다. 스스로가 얻어낸 ‘설 선물’인 셈이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4일 담양 공장 앞에서 ‘총파업 승리 기자회견’을 가진 이주호 위원장은 “비슷한 처우를 받고 있는 전국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며 “단체협약에 만족하지 않고 더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10일 상경투쟁을 마친 한솔페이퍼텍 노동조합원들이 이날 오후 한솔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한 건물에서 주먹을 불끈불끈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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