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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이 저항적 인물? 박정희 시대가 덧칠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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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이 저항적 인물? 박정희 시대가 덧칠한 기억”

입력
2017.02.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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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저항’ 이분법을 해체

다른 대중문화사 책과 달리

소소한 에피소드로 읽는 재미

“대놓고 노래로 저항한 김민기

괴롭히긴했지만 끝내 내버려둬

상업영화 만들던 이장호만 고초”

1970년대를 상징하는 미니스커트(위 사진)와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와 장발이 흔히 저항적 청년문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게 대중문화연구자 이영미의 주장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를 상징하는 미니스커트(위 사진)와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와 장발이 흔히 저항적 청년문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게 대중문화연구자 이영미의 주장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를 상징하는 미니스커트(위 사진)와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와 장발이 흔히 저항적 청년문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게 대중문화연구자 이영미의 주장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를 상징하는 미니스커트(위 사진)와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와 장발이 흔히 저항적 청년문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볼 것만은 아니라는 게 대중문화연구자 이영미의 주장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이영미 지음

인물과사상사 발행ㆍ400쪽ㆍ1만8,000원

“록이 저항성을 지닌다는 생각은 1990년대에 생겨난 것이며, 적어도 1980년대 초까지 한국의 록은 포크에 비해 훨씬 체제 순응적이었다. ‘신중현 – 록 - 저항정신’의 의미 연관성으로 당시 신중현을 저항적 인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대마초 사건으로 얻어맞는 이들은 이름 있는 대중예술인이되, 저항적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저항적이지 않는 게 낫다. 그래야 청년의 저항성을 탄압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 아닌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문제가 불거졌으니, 다시금 ‘박정희 시대’가 호출된다.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이장희의 ‘그건 너’ 사례 같은 대중가요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검열 얘기, 통기타 열풍과 장발이나 미니스커트에 대한 단속, 1975년에 터진 연예계 대마초 사건 등이 입에 오르내린다. ‘억압과 저항’이라는, 수학공식 같은 이분법의 재등장이다.

이영미 성공회대 교수의 ‘동백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는, 부제가 ‘대중문화로 보는 박정희 시대’임에도 이런 이분법적 통념을 해체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분법으로 피아를 구분 짓기보다는 밀물과 썰물처럼 들고 나면서 이리저리 출렁대는 ‘대중의 무의식적인 욕망’에 집중한다.

대중문화사 책은 대개 두터운 서술 전략을 쓴다. ‘이런저런 썰’ 혹은 ‘그럴 듯한 회고담’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 때문에 ‘대중문화’라는 재미난 소재를 다룸에도 정작 대중문화사 책 자체는 묵직해지고 딱딱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옆 친구에게 수다 떨 듯 썼다. 대중문화를 다룬 책 가운데 읽히는 맛이 가볍고 발랄한 축에 속한다. 스타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작가로 데뷔하던 시절의 이야기 등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읽는 재미도 만만찮다. 여기서 잠시 저자와의 일문일답.

-신중현은 박정희 찬양 노래를 만들지 않아 불이익을 받았다고 하는데.

“물론 불이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박정희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인 피해의식 비슷한 게 아닐까 한다. 신중현은 당대의 톱 클래스 가수였다. 김민기, 양희은 이런 가수들과 급이 다른 인물이었다. 암울했던 시대의 최고 가수였으니 음으로 양으로 억울한 일들은 있었겠지만, 그래서 그가 저항적이었다라고 보긴 어렵다.”

-록 음악은 저항정신을 내세우지 않았나.

“록은 저항의 음악이라는 식의 미국적 관념은 사실 그 당시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1990년대 이후 새롭게 상상된 쪽에 가깝다. 1970년대 청년문화에서 저항적이라고 한다면 록보다는 포크 쪽이었다. 그 또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포크 쪽도 딱히 저항적인 건 아니었다. 저항적이었던 이들은 김민기, 한대수 등 5명 정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1970년대 한국의 청년 음악을 ‘포크’가 아니라 ‘통기타 팝’이라 불러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일종의 아름답게 정리된 추억이자 회고담인 셈인가.

“광복 뒤 일제 시대에 억울하게 당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이나 활극을 벌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알고 보면 그 분들 거의 다 별 큰 일 없이 시대에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인데.”

-블랙리스트 때 놀라웠던 점은 ‘그게 불법인 줄 몰랐다’는 김기춘의 발언이었다.

“사실 우린 오랫동안 그리 살아왔다. 대통령을 왕으로 모시고 민주주의를 불편하게 여긴다. 요즘 태극기 시위 벌이고 계엄령 선포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우리의 본 모습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사는 게 그냥 체질화된 거다. 4ㆍ19 뒤에 ‘이승만이 무슨 죄냐 프란체스카 여사나 박마리아가 문제’라는 말이 나왔듯, 지금도 최순실이 문제지 박근혜 대통령은 잘못 없다 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김대중ㆍ노무현 정권 10년간이 딱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래서 저자가 흥미롭게 보는 지점은 이분법보다는 엇갈림이다. 김민기는 1978년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 ‘공장의 불빛’ 음반을 낸다.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정부가 너무 감시하고 괴롭히니까 차라리 사고 한번 크게 치고 감옥에 갈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끝내 김민기를 내버려뒀다.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괴롭힐지언정 “예술탄압의 구체적 사례를 남기는 사법처리만은 하지 않았다.”

이와 대비되는 게 ‘별들의 고향’을 흥행시킨 이장호 감독의 변신이다. 상업영화를 만들던 이 감독은 대마초 사건으로 고초를 치른 뒤 영화계를 잠시 떠났다. 1980년대 복귀해서 그가 내놓은 영화는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등 우리 사회 변두리를 조명하는 작품들이었다. 정작 대놓고 저항하는 이는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고, 엉뚱하게도 상업영화 감독을 리얼리즘 감독으로 ‘의식화’시킨 셈이다. 아이러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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